영화 유튜버 라이너의 철학 시사회 - 아이언맨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함께 만나는 필름 속 인문학
라이너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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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철학적 함의를 가지고 읽어내는 일이 종종 있다. 혹은 영화 속에서 철학적인 의미를 찾아내려고 할 때도 있다. 감독이 의도하고 철학적 함미를 채워넣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영화를 만들 땐 의도하진 않았지만 만들어진 결과물에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장면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는 그것이 눈에 너무 빤히 보여서 감독이 너무 쉽게 의미부여를 한다고 평가절하 당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너무 심오하게 그 의미가 꼭꼭 숨어 있어서 대다수의 관객은 그것을 놓치고 말지만 몇몇 사람들에 의해 발견당하고는 뒤늦게 화제가 되는 일도 있다. 반대로 어려운 철학적 개념을 영화를 차용하여 어려운 철학을 대중적인 영화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건 영화를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찾아보는 것은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한 방법이자 철학적 사유를 성찰하는 시간이 된다.


영화 유튜버 라이너의 철학 시사회는 철학자들의 철학 사상을 영화라는 돋보기로 보는 책이라고 말한다. 철학은 어렵고 고리타분하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철학에 영화라는 필터를 덧대서 걸러내면 대중성 있는 영화로 철학을 조금 더 쉽게 접하고 공부할 수 있게 될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책을 쓴 듯하다. 책에는 총 11편의 영화가 각각 영화를 읽어내기 위한 도구로서의 철학자와 짝을 이뤄서 소개되고 있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영화는 매트릭스와 조커, 블레이드러너였다. 그 외에도 선정된 영화와 그와 짝패를 이루는 철학자들의 명단만 봐도 흥미롭고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블레이드 러너를 플라톤과 연결하고, 기생충을 헤겔의 정반합으로 풀이한다니 영화를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영화적 재미와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매트릭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실제로 매트릭스가 처음 개봉했을 당시 온라인 상에서 매트릭스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체하는 시도가 많았었기 때문에 그 때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는 20년도 더 지난 그 옛날,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소통의 매체가 막 활발하게 꽃을 피고, 각자의 의견을 올리고 함께 토론하던 게시판 문화가 빅뱅처럼 터지며 여러 담론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와 맞물려 우리에게 도착했다. 물론 그보다 훨씬 이전인 하이텔 시절부터 영화에 대한 교류는 이미 있어왔고, 게시판을 통해 영화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매트릭스가 처음은 아니겠지만 매트릭스는 영화에 숨어있는 철학적 함의가 유독 많았고, 그런 이유로 영화를 보고 철학적 의미를 찾아내어 게시판에서 토론하는 양과 질이 다른 영화에 비해 월등히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영화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영화 속 철학에 대한 토론을 말하는 것이다. 마치 이 책에서 라이너가 영화로 철학을 톺아보는 것 같은 시도가 매트릭스 때 폭발적으로 많이 있었고, 열혈 영화광을 자처하던 그 철없던 시절이 떠올라서 매트릭스가 눈에 확 꽂혔던 것이다. 말하자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라 하겠다.


어쨌건 당시 매트릭스를 두고 많은 담론들이 오갔지만 매트릭스는 가상(가짜) 현실과 실제(진짜) 현실간의 불확실성 때문에 장자의 나비, 호접지몽이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 영화 속에서 영화 밖 세상의 현재 시점과 똑같은 모습을 한 세계는 뇌에 시뮬레이션 된 가짜 세계, 매트릭스이다. 진짜 현실의 세계에서 인간들은 기계장치 속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기계들의 생체전지 역할을 하고 있다. 네오가 살고 있는 그 세계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일종의 꿈의 세상이다. 너무나 정교하게 가공된 매트릭스라는 꿈의 세계에서 깨면 현실로 돌아오게 되지만 꿈에서 깨기 전까진 꿈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점 때문에 너무 뻔한 서사처럼 호접지몽이 인용되었다.


그리고 호접지몽과 함께 데카르트도 많이 인용되었는데 책에서도 데카르트의 인식론으로 매트릭스를 설명하고 있다. 데카르트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데카르트의 회의'라고 하는 의심의 방법이라고 한다. 이 의심의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데카르트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라고 하는데 이는 데카르트 철학의 확고한 기초이고 그 기본 개념은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의심한다는 방침이라고 한다. 데카르트가 가장 먼저 의심한 것은 감각이다.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는 등의 모든 감각들의 결과를 의심하는 것은 감각의 대상이 실재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단순히 주위 환경에 의한 변화나 착시, 신경의 교란 등으로 감각이 실제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넘어서서 장자의 경우나 네오의 경우처럼 꿈 또는 매트릭스에서 진짜라고 믿어지는 현실적 감각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신경의 교란이나 아무리 환각, 꿈 속이라도 바뀔 수 없는 수학과 기하학 같은 것은 무려 악마를 소환하여 이 악마놈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쯤되면 너무 간 것 같지만 이건 '데카르트의 악마'라고 해서 과학사에서는 꽤 알아주는 주장이다. 수학과 기하학처럼 똑 떨어지는 것도 악마의 농간으로 내가 잘못된 것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 이렇게 데카르트는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는 의심병환자 철학자였다. 지금 의자에 앉아 있는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의심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데카르트는 침대에 누워 자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꿈꾼 적이 있기 때문에 현재 상태를 의심할 수 있다고 답한다. 만약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자주 꾸었고, 데카르트처럼 의심병환자거나 음모론자였다면 모든 것을 의심하는 철학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다가도 문득 이것이 꿈이라고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여기서 데카르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란 데카르트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명제이다.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다. 세상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대상이 있을까? 악마놈이 아무리 교활해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를 기만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이렇게 미친듯이 의심병을 늘어놓는다는 것은, 적어도 의심하는 그 순간에는 의심을 하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내가 없다면 내가 의심을 할 수도 없을테니까. 그러니까 의심하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혹은 의심하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나는 분명 존재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반박불가 무적의 논리이고 나는 이것을 내가 찾던 철학의 제일 원리로 수용하겠노라 땅땅땅. 그래서 나온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이 말은 단순히 생각 좀 하면서 살아라 인간아, 이런 의미가 아니라 의심하고 있는 나는 의심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이고, 나를 의심하는 순간 동시에 나는 의심하고 있다. 사유하는 자신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진짜와 가짜에 관한 또 하나의 걸작으로 블레이드 러너가 있다. 당대 최고의 비쥬얼리스트인 리들리 스콧이 만든 저주받은 걸작으로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서 참패했으나 이후 영화가 재평가 받으며 포스트포던 논쟁까지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영화역사상 가장 주목해야 하는 SF영화 중 한편이다. 작중 복제 인간을 칭하는 리플리컨트는 인간의 겉모습을 흉내 내어 만든 복제품 시뮬라크르이다. 인간이 되고 싶은 여섯 명의 리플리컨드가 자신을 만든 창조주인 타이렐을 찾아 지구로 오게 되고, 리플리컨트를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데커드는 이들을 뒤쫓는다. 이 과정에서 데커드는 타이렐의 조카의 기억을 이식한 신형 리플리컨트인 레이첼과 사랑에 빠지고 마지막에 함께 떠나는데 영화는 진짜 인간과 복제 인간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데커드도 리플리컨트였다는 암시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리플리컨트를 잡는 리플리컨트였던 것이다. 하지만 데커드 본인은 물론 관객들도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간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인간을 정의하는가 하는 주제는 블레이드 러너 외에도 공각기동대, 로보캅, 아이로봇 등의 수많은 영화에서 차용되었다. 보통 이들 영화에선 인간을 영혼을 가지는 무언가가라는 식으로 정의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면 로봇에게도 영혼이 들어가면 그것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같은 심오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인간이 형태를 지니기 전부터 어디에선가 왔으며, 불멸의 것이고,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존재라는 인간의 이원성을 주장했다. 또 플라톤은 인간은 지혜, 용기, 절제의 세 가지 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지혜는 머리, 용기는 가슴, 절제는 배에서 나오고 이런 육체에 어디에선가 영혼이 와서 깃든다고 했다. 불멸의 영혼이 인간의 육체로 접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미 완성형의 영혼을 가진, 답을 내재한 존재라고 믿었다.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관념인데 데카르트는 이것을 본유관념이라 불렀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아의 입구에 '변천해 가는 생성의 세계에서 영원한 참실재의 세계로 영혼을 눈뜨게 하는 곳'이라는 문구를 적었다고 하는데 영혼을 눈뜨게 한다는 것은 영혼의 불멸, 완전성을 의미하고, 영혼을 눈뜨게 하면 참실재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참실재란 이데아를 뜻하는데 이데아란 바로 진리이다. 이는 물으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데커드는 인간과 리플리컨트를 구분하기 위해 질문을 한다. 리플리컨트에게는 가공된 기억, 감정, 경험이 입력되어 있고, 그것으로 리플리컨트를 구별해낸다. 하지만 리플리컨트는 그 기억과 감정이 실제라고 믿고 있는데 이는 매트릭스의 가짜 세계와도 이어진다. 가져본적이 없는 기억, 실제가 아닌 경험을 안고 사는 리플리컨트는 목에 전선을 꽂고 기계와 연결되어 실제가 아닌 매트릭스 속에서 살아가는 레오와 동일성을 가진다.


매트릭스에서 레오는 깨어있는지 잠들어 있는지 혼란스러워 하고 자신의 감각에 의문을 가진다. 그때 모피어스를 만나 매트릭스에 대해 듣게 되고 선택을 강요당한다. 파란약을 먹고 지금과 같이 믿고 싶은 것 믿으며 살지, 빨간약을 먹고 원더랜드로 가서 토끼굴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러 갈지 선택하라고 한다. 레오는 평생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의문을 가지고 살아왔고,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빨간약을 선택한다. 의심하고 의혹을 가지는 레오는 이제 진실로 존재하는 존재가 된다. 데커드는 질문을 하는 것으로 진짜 인간과 가짜 인간을 구분해내고, 로이 베티는 자신을 만든 창조주를 만나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하기 위해 지구로 숨어든다. 이처럼 두 영화에는 각각 데카르트와 플라톤이 주장하는 철학적 가치가 영화에 깊게 삽입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속에 이러저러한 철학적 함의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만 했었는데 책을 읽고 다시 영화를 생각해보니 영화 곳곳에 철학자들이 말하고자 했던 의미가 영상으로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려운 철학을 영화라는 대중문화로 희석시켜 배워보니 쉽게 이해가 되고, 반대로 영화를 철학이라는 돋보기로 들여다보니 이전에는 보지 못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조금 더 깊이있고 새로운 영화읽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재미있게 영화를 보고 즐거웠다면 그것만으로도 영화의 효용은 충분하지만 그 속에 철학의 돋보기를 드리우고 철학적으로 읽어내고 의미를 찾아보는 것도 영화읽기의 새로운 재미가 되지 않을까 한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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