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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공감 안 되는 거였어? - 현직 대중문화 기자의 ‘프로 불편러’ 르포, 2021 청소년 북토큰 선정도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1년 세종도서 하반기 교양부문 선정作 ㅣ 파랑새 영어덜트 2
이은호 지음, 김학수 그림 / 파랑새 / 2021년 2월
평점 :

금발은 가슴만 큰 멍청이고, 동양인은 수학을 잘하고, 한국인은 돈벌레에, 흑인들은 힙합 스타일의 옷을 입고 모두 총을 가지고 다닌다. 과학자는 산발을 하고 광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하나같이 뚱뚱하고 지저분한 오타쿠이다. 무리 중 뚱보 캐릭은 항상 어눌하고 행동이 느리며 먹을 것만 찾고, 마르고 키작은 아이는 말이 많고 까불거린다. 영화 등의 대중문화 속엔 이런 정형화된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인종이나 성별, 연령, 계급, 직종 등에 대한 고정관념인데 이런 특정한 이미지는 편견을 넘어 때로는 혐오의 텍스트로 쓰여지기도 한다.
물론 고정관념이란 것도 어느 정도의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인식이므로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이미지가 완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실보다 과장되게 정형화되어 그려지며 그러한 고정관념을 확대 재생산 하는 부정적인 역할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기반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교육된 것이므로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이미지는 그 당시의 시대상에 국한되고, 시대의 변화와 사회 분위기에 따라 계속 바뀌게 된다. 그러나 영화 속의 스테레오 타입의 이미지가 그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 영화가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고 괴리감을 가지게 될 때 공감받지 못하고, 누군가에겐 불편하게 느껴지게 된다.
우선 글을 시작하기 전에 공감이란 말의 허상에 대해 먼저 생각해 봐야 하겠다. 애초에 공감이란 서로의 동일한 경험이나 공통된 것을 감지해내어 하나로 향해 가는 감정이다. 말하자면 공통된 경험을 기반으로 한 공통의 감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경험이나 공통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서로 공감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생리를 해본 적이 없는 남자가 여성의 생리의 고통에 어떻게 공감할 것이며, 출산의 경험이 없는 남자로서는 그 고통에 결코 공감할 수가 없다. 가져보지 못한 시간과 경험해보지 못한 순간을 공감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것은 마치 먹어보지 못한 음식의 맛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먹어보지 못한 음식의 맛은 절대 느낄 수가 없다. 다만 설명에 의해 이해하게 될 뿐이다. 똑같이 느끼지 못하는데 어떻게 동일한 감정, 공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병적으로 공감을 강요한다. 물리적으로 공감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까지 공감을 강요하니 자꾸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아이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공감하라는 것처럼 어떤 영역과 관계에서의 공감이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프로세스인 셈이다. 정말이지 공감이란 말에 나만 공감 안 되는 거였어? 라고 묻고 싶다. 그렇다고 상대와의 소통과 연대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너와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타인과의 동일시를 전제하는 공감이 아니라, 너와 나의 구분을 전제하면서도 너의 감정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존중한다는 감정이입의 마음, 똘레랑스가 있다면 함께 연대하고, 화합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공감보다는 감정이입, 똘레랑스, 존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공감이 안되니 혐오하고 조롱하게 되고, 그것을 오락거리로 삼는 것이다. 공감을 버리고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너그럽게 감싸는 똘레랑스를 가진다면 차별과 혐오로 발생하는 여러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82년생 김지영]을 그동안 영화계에서 소외됐던 여성들의 서사들 담아내려는 노력이라고 말한다. 일부에서는 김지영은 가장 보통의 한국 여성이며 한국 여성이 당하는 차별과 억압을 보여준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오히려 여성의 피해를 과장해서 남녀 갈등을 조장한다고 말했다. 저자는 이 영화가 여성이 받는 극심한 차별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과장하거나 부풀리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요는 차별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실제하는 차별을 인정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남녀차별을 부정하거나 그것이 실제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진 않는다. 분명 한국은 남녀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차별의 정도와 수준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하는 바가 다를 것이다.
이 영화의 주 타켓층인 2030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보자. 과거 7~80년대 어머니 세대가 2030일 때 받았던 차별과 21세기 현재의 2030 여성들이 받는 남녀차별은 결코 똑같지 않을 것이다. 남녀차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정도와 수준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차별의 강도는 낮아졌으나 정신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차별의 강도는 똑같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있겠지만 차별의 절대적인 수준과 강도가 예전보다 약해졌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영화는 과거 어머니가 받았던 남녀차별을 현재의 그것과 동일시하여 모든 한국 여자는 어머니와 같은 피해자라고 말한다. 물론 남녀차별이란 측면에서 모든 여자는 피해자고 그것은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지금의 2030들이 어머니 세대와 같은 수준의 차별을 받고 있나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7~80년대의 차별을 현재로 가져와서 현재의 2030이 그런 차별을 당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과장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런 수준의 차별을 당하고 있는 여성들도 분명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저자가 말했듯 21세기 현재 '가장 보통의 한국 여성'이 겪는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동의하기 어렵다.
많은 여성들이 영화를 보고 '공감'했다고 하는데 적어도 결혼도 하지 않은 여성들이 며느리의 고통에 공감하고 분노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의 감정을 마치 내가 경험한 양 그 고통에 싱크로하여 분노하는 것은 한마디로 거짓이다. 딸의 입장에서 엄마가 당한 것을 기억하며 분노하거나,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에 분노한다면 그것은 공감이 아니라 감정이입, 똘레랑스여야 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김지영이 엄마가 받은 차별에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을 빙의라는 형태로 풀어내었다. 빙의, 다른 누군가의 영혼이 나에게 들어와서 내가 마치 그 사람인양 생각하고 느끼는 것. 이건 말그대로의 감정이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감정이입이 아니라 공감을 키워드로 내세웠고, 심지어 남성에게까지 김지영에게 공감을 강요하며 그러지 않는 남성들을 적대시하였다.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의 영화인데 공감을 강요하니 당연히 트러블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가 여성이 받는 극심한 차별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틀렸다고 생각지 않는다. 또 그 차별을 과장하거나 부풀리지 않았다는 입장에도 크게 반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이 여성이면 누구가 겪게 되는 보편적인 것이냐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보편적이지 않은 경험을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이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는 다르고,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차별이 잘못되었고 인식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격하게 동의한다. 다만 영화가 그것을 다루는 형식과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가 소위 '공감' 안된는 거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남녀 갈등을 부추긴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저자는 다른 영화에는 공감 못하면서, 유독 이 영화에는 공감하는 것에도 공감 못하겠다.
책엔 흑인, 뚱뚱한 사람, 장애인, 여성, 조선족 등의 특정 대상을 영화가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어떤 차별과 편견의 이미지로 그려지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그런 이미지가 형성된 원인과 그로 인해 촉발된 여러 사회문제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영화는 현실을 담고 있어서 사람들이 가지는 현실에서의 이미지가 영화에 투영되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차별과 편견을 가지게 된 원인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런 이미지로 영화가 만들어지면 실제보다 좀 더 극적이고, 과정되어 그려지게 되고 그런 재생산된 이미지를 통해 편견과 차별은 커져서 혐오의 수준으로까지 확장되며 차별과 편견이 가속화된다는 점이다. 그런 상호작용을 통해 인식이 널리 퍼지면 보편적인 정서로 자리잡고 누군가 특정 집단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지게 된다. 영화가 만들어낸 차별과 편견에 익숙해져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하게 되기 전에 끊임없이 불편해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잘못된 혐오와 편견의 인식을 깰 수 있을 것이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심플하다. 영화나 대중문화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지는 차별의 코드와 혐오의 테스트,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사회분위기에 딴지를 거는 것이다. 소위 삐딱하게 보기. 기존의 관성에 빠져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차별과 혐오를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경계하고 잘못되었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분명 책에서 문제제기를 하기 전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하지만 이건 공감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공감이라는 코드 때문에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희화화하는 그 대상은 타자이고 나와 동일시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애초에 나와의 교집합이 없는 타자에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저자가 말한 '공감이 안된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리고 주장하는 바에도 적극 동의한다. 다만 공감이란 말 대신 감정이입과 이해의 코드로 접근하면 더 좋을 것 같다. 어쨌건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차별과 편견, 혐오의 코드를 살펴보고,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채 그런 잘못된 관념에 빠져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보고, 그러한 이미지를 깨기 위한 노력을 위한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