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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언니의 방구석 극장
양국선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12월
평점 :

영화는 세상과 만나는 방법이다. 책의 소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영화평론가 정성일 아저씨의 지론이다. 20세기에 영화 좀 봤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정성일이라는 이름 석자를 들어봤을테고, 그의 평론 좀 봤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정성일 평론가의 영화론에 대해서 지겹도록 들어봤을 것이다. 영화란 세상에서 만들어져서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고 결국 영화란 세상과 만나는 방법인 것이라는 말. 뭐 정확한 워딩은 아니겠지만 정성일 평론가는 이런 늬앙스의 말을 자주 했었고, 우리가 이렇게나 심각하게 영화이야기를 하는 것도 결국 영화 그 속에 인생, 현실, 삶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영화란 전혀 생뚱맞은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현실로 다가올 수도 있는 일이며, 다른 누군가는 지금도 그 영화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고, 혹은 그런 영화가 필요한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정성일 아저씨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그 영화를 필요로 할 때, 그 영화가 정확히 제 시간에 도착하면 거의 죽고싶을 정도로 마음을 흔든다고 했다. 그 영화가 그 영화를 필요로 하는 나의 인생과 정확하게 싱크로되면 그 영화는 심금을 울리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는 그렇게 영화로 세상을 만난다.
그래서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에서 세상을 읽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종종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개인사로 영화평론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영화와 세상이 하나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명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읽기의 방법인 것이다. 이 책 역시 저자의 개인사를 영화와 연결하여 영화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이야기라고 했는데 정확히는 영화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많은 담론을 나누고 있다. 담론을 나눈다는 표현을 썼다. 그저 개인적인 이야기나 영화에 대해 자신의 감상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함께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근황토크를 하듯 저자의 개인적인 일상의 썰을 조금 풀어놓고 아주 자연스럽게 저자의 일상이 영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엔 저자의 현실로 돌아와서 영화와 현실의 소회를 드러낸다. 저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그 사연을 담을 수 있는 영화를 한 편 골라내고 그 영화를 자신의 인생과 싱크로하여 생각하며 자신의 감정을 돌아본다. 저자의 이야기를 영화에 대입해보기도 하고, 영화를 저자의 에피소드로 치환하여 생각해보면서 이 사람은 자신의 이런 에피소드에서 이런 영화를 떠올렸구나, 영화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마치 액자식 구성의 또 다른 영화를 보듯 두 개의 이야기를 보게 된다.
앞서 이 책은 영화평론이나 해설을 하는 책이 아니라고 말했었는데 이 책은 영화를 통해 치유받고, 성장하고, 자아를 찾는 법을 알려주는 영화사용설명서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고, 감정적으로 치유가 되는 경험을 하는 사람도 있고, 영화에 자신을 모습을 투영해서 그 속에서 해답을 얻게 되는 일도 있는데 이상하게도 똑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바뀌는 사람도 있지만 바뀌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이유를 우디앨런의 '블루 재스민'을 예로 들며 영화를 접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영화가 가진 힘을 이해하고 영화를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이뤄낼 수 있게 영화를 활용하는 법을 함께 생각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소한 일상의 에피소드를 영화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것이 귀엽고 재미있는데 카카오뱅크 적금으로 100만원이 모아지는 꿈을 꾸는 것에서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의 신칸센 왕복 열차가 교차되는 순간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는 아이들의 꿈을 연결시키고,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과를 졸업하고 영화 관련 일을 했지만 현실의 높은 벽 때문에 상업 영화의 길을 포기한채 지루한 매일에 지쳐가던 자신의 인생담을 [카모메 식당]의 헬싱키 백반집으로 옮겨놓고 일상의 행복과 위안을 찾고, 폐암 수술을 하신 엄마와 제주도 여행을 떠나면서 가족의 죽음과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을 [8월의 크리스마스]로 녹여낸다는 식의 연결점이 마음에 든다.
개인적으로도 영화를 보고나면 그런 식의 느닷없는 개인적인 에피소드와 영화의 연결점을 찾아내어 생각하는 일이 많은데 저자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영화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영화 속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 혹은 대립각에 놓고서 영화속 인물의 인생과 가치관을 나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과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고, 영화를 통해 내 인생과 행복한 삶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한다. 결국 영화는 세상 속에서 탄생하여 우리 앞으로 다가왔고, 그래서 영화는 세상을 담고 있고, 우리는 그 영화에 담긴 세상을 보며 나의 현실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영화를 보며 영화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는 것들인 셈이다.
영화 중엔 나에게도 큰 울림이 있었던 영화도 있고, 바로 며칠전 봤던 영화도 소개되고 있어서 나의 감정과 느낌을 저자의 생각과 비교해가면서 읽으니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영화는 주로 여성 취향의 영화가 많다. 그리고 한국 영화, 헐리우드 영화, 일본 영화가 골고루 포함되어 있고, A급 배우가 나오는 영화에서부터 독립영화까지 다양하게 포진해 있다. 그런데 의외로 중화권 영화는 없는데 홍콩, 대만 영화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이런 주제에 잘 부합되는 중화권 감독의 영화도 포함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포기하긴 했지만 영화 관련 일을 하다가 인연이 닿아 정성일 평론가와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정성일 평론가를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책의 추천사까지 써주시다니 참으로 부럽기만 하다. 아마도 추측하건데 내가 그러했듯 저자 역시 정성일 아저씨의 평론을 많이 들으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던 것 같다. 에필로그에도 정성일 아저씨가 틈만 나면 인용하던 프랑수아 트뤼포의 구절을 써놓은 것으로 보아 아마 그러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래서 그런지 책에서 왠지 정성일 아저씨의 냄새가 많이 나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어설픈 따라하기나 정성일 아저씨의 동어반복이란 의미는 아니다. 그저 저자와 내가 나이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한때 영화를 좋아하고, 정성일 아저씨의 평론에 열광하던 젊은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는 친숙하고 오랜 영화친구를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