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의 사회학 - 디자인으로 읽는 인문 이야기
석중휘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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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호구가 된다. 직장 내의 상하수직 관계에서도 갑을관계가 만들어지고, 수주를 받아 일을 하는 업체간에도 갑을관계가 형성되며 을의 위치에 놓인 업체는 호구가 된다. 때로는 을과 을 사이에도 호구가 되기도 한다. 을의 업체에서 일하는 말단의 직장인이라면 그야말로 을 중의 을, 슈퍼호구가 된다. 저자는 대표적인 을의 집단인 디자인 업계에 몸을 담고 있는데 그쪽 업계에서 일을 하는 것은 고충이 많은 것 같다. 지인 중에도 디자인/마케팅 업계에서 일하는 친구가 몇 있는데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하곤 했다. 이 책은 저자가 디자인 쪽 일을 하며 디자이너로서 경험하고 바라본 우리 사회에 대한 짧은 단상들의 모음이다.


오래전 무한도전에서 길을 가던 한 회사원과 인터뷰를 하는데 그 회사원은 스스로를 노비라고 소개했다. 또 일본에는 회사에 가축처럼 매인 신세라는 뜻의 사축이란 말이 쓰이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회사와 연봉, 정규직과 비정규직과 같은 복잡한 계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배웠지만 회사와 연봉에 따라 서열을 나누고, 정규직/비정규직으로 계급을 나눈다. 그 서열과 계급에 따라 회사간, 사원간에 갑을관계가 형성되고 이는 21세기의 새로운 신분제가 되었다. 이른바 직장계급사회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을이 겪어야 하는 겪한 업무와 노동이 낭만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CM 등을 떠올려보면 이런 이미지가 자주 차용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 무리의 직장인들이 열띤 회의를 하고, 하얀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올리고서 급하게 전화를 하거나 서류를 만들며 밤이 늦도록 일을 하다가 마감시간 전에 업무를 끝내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서류뭉치를 하늘로 날려버리는 그런 이미지들. 우리 사회는 그런 것을 열정이나 낭만으로 포장하고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고, 악덕 업주한테 당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의 낭만은 조직의 우두머리를 위한 효용의 역할로 계급간의 간극을 폭력적으로 메워가는 억압의 매개물이 되었다.


어쩌면 낭만은...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살기 힘겨운, 그런 시절에 대한,
또 나에 대한 자조적인 미안한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리의 비참함을 감추기 위한 그런 미안함에?


이런 서열과 계급의 불편함은 결국 꼰대 담론으로 이어진다. 회사의 오너들, 즉 최상위 포식자들은 피라미드 아래에 있는 직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건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인가보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남들보다 앞서서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디자인 업계에서조차 꼰대들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들 꼰대들은 언제나 아웃사이더의 속사포랩처럼 라때는..을 외친다.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서 서로의 목소리만 높이고 있다. 한쪽은 어린 세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한쪽은 기성 세대를 꼰대라 욕한다. 꼰대는 결국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저자는 195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되었을 때도 작은 움직임이 당시의 환경과 기술의 바람을 타고, 사회와 사람들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때 그 변화를 주도한 사람들이 바로 지금 라때는말이야를 찾는 그 사람들이다. 한 때는 변화를 주도했지만 지금은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그들이 꼰대라고 배척하던 바로 그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절의 가장 큰 화두는 스스로의 삶을 위해 사는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세대가 추구하는 것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서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고, 그것으로 세대간의 갈등을 줄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했던 1950년대보다 오히려 지금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에 잘 부합되는 시대가 아닌가 하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키워드가 해체였다면 권위적인 중심세력이 모두 해체된 상태를 누리는 지금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일 수도 있다는 뜻인 것 같다. 지금은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기준은 모호해졌고, 그것을 구분 지으려는 행태 자체가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역행하는 꼰대마인드가 되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소위 비주류의 B급문화가 주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비주류, 꼰대들의 문화로 치부되던 트로트에 젊은 세대들이 열광하는 것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과거에 B급은 저질이고 쌈마이로 치부되었었다. 특히 해외의 A급 선진 문화와 우리의 B급 문화를 구분하여 A급은 확산하고 B급은 경멸하였다. B급의 우리의 문화는 지양하고, A급의 외국의 선진 문화는 지향하는 문화사대주의가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회에 팽배했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난 지금 당시의 B급 문화는 추억팔이의 그리운 문화가 되었다. 그 시절의 B급 문화는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의 하이웨이에서 잠시 벗어나서 추억속에 잠깐 쉴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 되어준다. 그랬던 B급 정서가 유행을 타고 이젠 권력이 되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외국물을 먹은 것이 A급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어졌다. TV는 외국물 먹은 사람들을 영웅으로 만들었고, 영웅 신드롬이 되었다. 채소와 과일, 잡곡 섭취를 늘리고, 육류 섭취를 줄이는 자연식 건강요법을 한국에 소개한 이상구 박사 때문에 건강 신드롬이 불면서 정육점과 육류 식당에 손님이 줄고, 채소 소비량이 급증했다고 한다. 이상구 박사가 TV에 나와 채식만으로 영양 섭취가 가능하고, 육식은 성인병을 유발한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웬걸 고기집에 손님의 발길이 뚝 끊어진 것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이끈 이상구 박사가 단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영웅시 하고, 그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었던 것이라고 분석한다. 88올림픽 직후 그 당시는 선진화에 목말라 있던 시기였고, 선진화와 미국화를 동일시하면서 미국에서 온 박사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것으로 맹신했던 것이다. 심형래 감독의 디워가 애국마케팅을 하고 원더걸스가 미국에서 고생한 스토리를 풀어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쪽 업계에서 호구로 살아가는 디자이너/마케터의 시각으로 바라본 사회를 다양한 테마로 말하고 있는데 각각의 테마가 씨줄과 날줄처럼 이어져 있어서 각각의 사고가 하나의 사회를 직조하고 있는 듯 하다. 재미있는 주제도 있고, 생각해볼만한 테마도 있어서 나쁘지 않은 인문학 책이지만 문장이 필요 이상으로 멋을 낸듯 잰체하다보니 문장이 그다지 매끄럽지 못하고 쉽게 읽히지 않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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