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읽는다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 - 한국사를 다시 읽는 유성운의 역사정치 지도로 읽는다
유성운 지음 / 이다미디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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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현재의 역사관으로 과거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건 과거의 역사를 오늘날의 실정에 반영하는 것이건 어떤 경우건 과거의 사건을 토대로 현재의 역사를 새롭게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현재 우리가 처한 여러 문제들을 과거의 선조들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피고 과거의 일을 반면교사 삼아 현재 우리가 나아갈 바를 생각하고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역사는 필요하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의 본질은 똑같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나 외교의 측면에 있어서는 분명 과거로부터 배울점이 많다. 그것이 성공사례이건 실패사례건 어느 것이건 지금 우리에겐 큰 교훈을 주고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저자는 역사 중에서도 정치적인 영역에 집중한다. 정치란 사회의 각종 고민들이 모여들고 이해가 충돌하는 영역으로 역사란 모든 정치적 행위들의 합과 같다고도 하겠다. 사람 사는 것이 결국 이해가 충돌하고 서로간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반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내문제건 국제 사회에서의 문제건 대부분의 사건은 정치적 이거나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문제들일 것이다. 고로 현재 발생하는 한국의 정치 현실이나 각종 사회 이슈들이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더라도 과거 역사적 사건에서 오버랩되는 것을 찾아 그것과 연결하여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을 해결하거나 새로운 시각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잘못 알려졌거나 사실과 다른 것이 많다고 한다. 때로는 식민사관에 의해 필요이상으로 낮게 해석되거나, 과도한 국뽕으로 과도하게 뻥튀기 되어 알려진 경우도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흥분시키는 극적인 이야기는 다 빼고, 담백하게 사실만을 바라보고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되집어본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의 국왕, 조선 사림, 임진왜란, 조선 사회라는 여섯가지 테마로 각각 역사적으로 주요한 정치적 사안을 살펴본다. 이야기의 끄트머리엔 아주 약간 현대 한국의 정치상황을 빗대어 말하고 있는데 그리 많은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다. 저자가 역사를, 정치를 보는 시각이 어떤지 한번 살펴보자.


저자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이 한국 역사의 비극이라고 말한다. 일본과 중국은 임진왜란 이후 권력의 재편이 일어나며 역사적으로 새로운 장이 열렸는데 '가장 무능한 모습을 보였던' 조선만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근대국가로 전환되지 못하고 정체되었다는 견해다. 이런 주장의 기본적인 취지는 동의한다. 당장 류성룡의 징비록이 조선보다는 일본에서 많이 팔렸다고하니 당시의 기득권은 반성을 하지 않았고, 국란을 겪고도 조선은 바뀌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성리학에 함몰되어 유교적으로 꽉 막힌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으니 발전이 더디고, 그 결과 이후 열강들에 나라를 빼앗긴 수모를 당한 것이리라. 같은 논리로 일제 강점기 이후 친일조선이 망하지 않았던 것과 두 번의 군부독재 이후 독재국가로서의 한국이 망하지 않은 것 역시 뼈아픈 역사의 한이라 하겠다.


그런데 정말 저자의 말처럼 임진왜란 때 과연 조선이 '무능한 모습'만 보였던가? 이 의견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최근 임진왜란사를 공부하고 있는데 공부할수록 그동안 몰랐던, 역사시간에는 배우지 않았던 수많은 눈부신 승리의 기록을 접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오직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명나라 덕분에 전세가 뒤바뀌고 왜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배웠는데 정말 대단한 조선의 용장, 맹장들이 존재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조선군이 그저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명나라의 도움으로 겨우 어려움을 이겨낸 것이 아니라 명의 참전 이전에 이미 전세가 뒤바뀌고 있었다는 것도 확인했다. 오히려 한양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패주하는 왜군을 일격에 섬멸할 수도 있었지만 일방적으로 왜와 휴전을 해버린 명의 방해로 적을 눈앞에서 놓아주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명이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우리땅에 발을 디딘 왜군은 모두 말살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저자는 사실과 다른 뇌피셜은 분노 게이지를 끌어올려 건강을 해칠 뿐, 역사를 제대로 인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정작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활약을 폄하하는 것이야말로 저자가 지양해야한다고 말한 왜곡된 역사의식이 아닐까한다.


명나라 대장 이여송은 조선인을 죽여 머리를 깎게한 후 왜구를 죽였다며 공을 부풀려 보고하였다가 명나라 본국에서 감찰이 뜨기도 했다. 또 공을 세우려고 무리하게 진격했다가 고니시의 역습에 걸려 참패하고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친 이여송은 그 후로 왜군과 싸우지 않고 엉뚱하게 사기꾼 같은 심유경을 보내 고니시와 휴전을 맺고 몇 년 동안 지지부진한 시간만 보낸다. 마치 6.25때 유엔군과 공산군측이 2년 동안 휴전회담을 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우리땅에서 벌어진 우리의 전쟁이지만 전작권을 우리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패싱당하고 다른 열강들끼리 우리나라의 처분을 두고 회담을 벌렸던 굴욕적인 사건으로, 아쉬울게 없는 그들은 지지부진 시간만 끌었으며 그동안 우리 민초들만 죽어나갔다. 이런 일이 또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국방을 바로세우고 자주국방의 기치아래 전작권을 가져와야만 한다. 그런데 책에 이런 내용은 전혀 없다. 가장 중요한 결론은 그것인데 왜 이것과 관련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는 것인지 심히 궁금하다. 이 글이 실린 <중앙일보>는 현재까지도 전작권 환수는 안된다는 기조를 보이고 있다. 그야말로 이런 두 번의 뼈아픈 역사를 보고도 아무것도 배운게 없다는 뜻이다. 이들은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이 전혀 없이 오히려 나라가 망하는 길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분노하는 지점이다.


또 저자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활약을 소개하며 지난 신천지로 인한 코로나 1차 확산 때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인 의료진을 의병들에 비유하였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정부를 선조처럼 묘사하고 대구 시장을 분조를 이끌고 의병들을 통솔한 광해군처럼 묘사하는 늬앙스를 풍긴다. 왜 아니겠는가? 그게 <중앙일보>의 스탠스 아니었던가? 아주 기가 차고 어이가 없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조정에 반기를 들고 일본을 따랐던 순왜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정말 코로나 사태 때 나라를 위태롭게 한 순왜가 누구인지 무릎을 맞대고 따져보자. 저자는 마치 현정부를 선조에 빗대어 의병들간에 불화를 가져오고 혼란을 초래했다고 말하는데 정작 국민들을 편을 갈라 갈라치기하고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로 극도의 혼란을 부추긴 것은 언론이었다. 이런 추악한 모습의 언론이야말로 조정에 대항하여 나라가 망하건말건 일신의 영달만 꾀하던 순왜를 연상시킨다.


다른 대목을 보자. 일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고려는 지속적으로 일본에게 국교 수립을 요청한다. 하지만 일본은 냉담했고 고려의 요청을 계속 거절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은 고려를 무시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고려의 문종은 (하필 '문'종이다)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정성을 다해 일본을 대하며 국교 수립을 요청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굴욕외교인 셈이다. 그런데 저자는 고려의 이런 굴욕 외교가 정확한 외교적 판단에 의한 결정이었다고 칭찬한다. 즉,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북쪽 압록강 유역에서 거란과 여진과의 갈등이 심했으므로 군사를 북방에 집중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후방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했기 때문에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혼란을 겪다가 나라가 넘어간 것을 이유로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려는 외교적 행동은 올바른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특히 문종이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기 위해 대가리를 숙이고 낮은 자세로 기었던 것도 대의를 위해 잘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아주 기가 찬다. 그래서 문종의 굴욕외교의 결과 고려가 일본과 국교 수립이 되었나? 일본이 고려의 든든한 동맹이 되었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게나 정성을 다하고, 제발 함께 해달라고 일본에게 설설 기었지만 일본은 자신들에게 대가리를 숙이는 고려를 우습게 봤고, 자신들의 아래로 생각했다. 그런 나라와 국교를 수립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굴욕 외교는 고려를 약한 나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일본이 고려를 침략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고려 말기 40여년간 왜는 고려를 600회 가까이 침략하였다. 고려는 줄곧 소극적으로 회유책을 썼으나 왜의 침략은 계속되었고 뒤늦게 강경책으로 돌아섰지만 그땐 이미 늦어버리고 말았다. 저자는 이 사건을 작년에 있었던 일본의 경제공격과 연관지어서 우리 정부를 향해 '실리'를 위해서는 '문'통이 일본에게 대가리를 숙일줄도 알아야 한다는 늬앙스로 글을 이어가고 있다. 이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저자가 요구하는 문종식 굴욕외교는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시키지 못하는 실패한 마키아벨리즘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벤치마킹하라는 것인가?


이미 역사적으로도 굴욕외교를 했던 고려는 일본과 화친을 맺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의 침략을 당해서 나라가 멸망했다. 저자 스스로 그런 내용을 책에 적어놓았으면서도 어떻게 일본에게 굴욕적이더라도 대가리를 숙일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인가? 그리고 당시 고려는 앞서도 말했듯이 북쪽으로 거란, 여진과의 갈등이 있었다. 이것을 지금의 국제정세에 대입하면 한마디로 북쪽에 있는 북한이 주적인데 북한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일본에게 굴욕협상을 하더라도 일본 비위를 맞추라는 소리다. 애초에 북한을 적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종전선언과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를 모색하면 될일이 아닌가? 왜 굳이 북을 적으로 삼고, 북에 대응하기 위해서 일본에 굴종의 모습을 보여야 한단 것인가? 백보 양보해서 북이 우리의 주적이라 한들 북을 상대하는데 일본의 힘이 필요한가? 아니면 우리가 북한을 견제하는 동안 일본이 다시 침략이라도 할 수 있다는 그런 뜻인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역사란 해석의 영역이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분위기를 대입하여 과거의 역사를 읽어내는 것은 좋지만 제대로 된 비유와 정확한 상황판단이 필요하다. 물론 정치적 해석에는 그 사람의 정치적 시각이 들어갈 수 밖에 없으니 지극히 주관적이 해석이 될 수 밖에 없겠지만 이렇게 되면 그저 현 정부를 비난하고, 일본을 추종하기 위해 과거의 역사를 가져오는 것 밖에는 안된다.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자신의 정치적 시각에 문제점은 없는지 곰곰히 따져보고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순신 장군의 왜에 대한 평가로 글을 가름한다. [왜는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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