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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식사 - 대한제국 서양식 만찬부터 K-푸드까지
주영하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11월
평점 :

한 나라의 식문화는 그 나라의 사회와 정치, 문화와 밀접하게 연동되며 함께 변화해 간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식문화는 그 나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게 된다. 우리의 식탁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식문화는 굴곡진 근현대의 역사와 함께 지난 100년동안 빠르게 변화해왔다. 특히 조선이 외국에 문을 열게된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부터 한국의 식탁에는 다른 나라의 음식이 본격적으로 도입이 되며 식문화의 형태도 과거와는 많이 바뀌었다. 이 책은 세계 식품체제의 형성과 한반도 편입이라는 프레임을 적용하여 한국사의 주요 시기에 이루어진 한국인의 식생활과 세계 식품체제와의 접점을 살펴보며 개항 이후 145년 간의 한국 음식의 변천사에 대해 알아본다.
19세기 말부터 21세기 초반까지의 한국의 근현대사를 개항, 일제강점기, 전쟁, 냉전, 압축성장, 세계화라는 여섯 시기로 나누어 한반도가 세계 식품체제에 편입해 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처음 다섯 시기는 한국이 세계의 식품체제를 받아들이고 거기 편입되는 과정이었다면 21세기 현재의 세계화 시기는 한국에서 생산된 이른바 K푸드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한국이 세계 식품체제의 한 축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식품의 취향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적 산물로서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145년간 이어져온 한국의 식생활의 변천사를 통해 한국 음식문화가 만들어지는 역사를 알아본다.
개항의 시대는 외국 문물이 쏟아져들어오던 시기였다. 쏟아져들어온다고는 해도 현재의 문화 유입의 속도만큼 빠르게 들어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등 다양한 국가의 식품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이나 중국만큼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조선으로 들어오던 서양인은 조선의 음식이 입에 맞을지 걱정을 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먹을 것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조선 황실은 서양인을 접대하기 위해 무려 서양인 요리사 까지 초빙하여 서양 손님들에게 서양 음식을 대접했고, 한국인 특유의 사대정신 때문인지 소위 관료와 상류층들은 서양의 테이블 매너를 익히는 것이 필수교양처럼 생각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부터 벌써 서양의 우이쓰기(위스키)와 맥주가 들어왔고, 젊은 양반들이 독한 위스키를 즐겨마셨다고 한다. 고종이 고비 즉 커피를 즐겨마셨다는 것도 유명하다.
이 당시 세계의 식품의 유입은 어떤 면에서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조선의 황실이 조선으로 (처)들어온 서양인의 입에 조선 음식이 맞지 않을까 걱정하여 제국주의자들을 대접하기 위해 서양음식을 만들고, 그들의 식사 예법을 받아들인 것에서 시작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를 집어먹기 위해 조선으로 들어온 열강의 입맛까지 신경쓰다니 우리네 조상들은 참으로 속도 좋았다. 서양인을 모셔놓고 한국식 만찬(코스요리)를 맛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한국의 음식이 외국으로 건너가는 일은 없이 일방적으로 외국 식품을 받아들이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외국의 음식이 전파되고 퍼지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이런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유입이 더욱 심해졌다. 당시 일본은 한국보다 먼저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였는데 그로 인해 이미 서양식 음식이나 기술적으로 대량생산한 식품들이 많이 있었다. 일본은 그런 식품들로 조선의 입맛을 일본식으로 바꾸려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아지노모토, 바로 미원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20주년 기념으로 청사를 짓고 조선박람회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서 미원을 처음 선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애드벌룬도 띄우고, 신문에 광고도 때리며 대대적으로 홍보를 한 모양이다. 이때부터 한국의 외식산업은 미원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장유, 일본식 간장도 식당을 중심으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일본 손님이 많은 조선요리옥에서는 왜간장으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이를 본 김재은이라는 인물은 스키야키가 신선로를, 후쿠진즈케라는 절임식품이 짠지를, 양과자가 다식을, 정종이 소주를 정복했다며 조선의 요리 독립까지 잃어버렸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1930년대가 되자 조선사람 중에서도 일본의 식민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이들 중엔 일본이 전파한 각종 신문물을 즐기는 사람들도 늘어났다고 한다. 일본은 바로 그것을 노리고 조선인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꺾기 위해 신문물을 계속 퍼트렸다. 경복궁에 밝혀진 전등불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카페와 선술집에는 모던보이들이 재즈를 들으며 커피와 양주를 마셨다. 그로 인해 조선은 근대와 전통이 마구 뒤섞여 혼재되었다. 생각해보면 현재 한국인의 입맛과 식문화가 이 때부터 일본식으로 많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지만 사람들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식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는데 흉작으로 인해 부유층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한국은 극단적인 식량 부족의 시대를 겪게 되었다. 최악의 식량 부족 상황에서 유엔군의 구호물자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최고급 요릿집이 손님으로 붐볐다고 하니 한심한 노릇이다. 이때는 워낙 먹을 것이 없다보니 후방의 사람들은 쌀 대신 감자나 국수 같은 대용식을 먹자는 운동이 벌어졌고, 쇠고기 국물 대신 멸시 육수를 내는 것도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고, 영양식인 메뚜기를 잡아먹자고 장려했다고 한다.
메뚜기와 함께 유행한 것이 바로 뻔데기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목화농사를 장려하여 경상도 쪽에 잠업이 성행했다고 한다. 그 목적은 싸고 좋은 명주실을 수탈해가서 일본에서 비단 제조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로 인해 경상도 쪽에는 번데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이미 영양가 높은 번데기를 많이들 먹었다고 한다. 외국인 기피 식품 1위인 고단백 영양간식 뻔데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소면도 쌀을 대신한 대용식으로 유행했다. 함경도 피난민들이 메밀가루를 구하지 못해 밀가루로 냉면처럼 만든 것이 부산의 소울푸드 밀면이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렇게 배고프고 못살던 시대를 지나 냉전시대가 되면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소위 미국의 원조인데 전쟁기간 중에 긴급원조를 받고,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61년까지 본격적인 원조(aka 무상제공)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62년부터 93년까지는 차관 전환 시기였다. 잉여농산물은 미국에서 대량생산된 밀, 보리, 콩 같은 양곡 중 미국에서 자체적으로 소비하지 못하는 남는 것들을 말한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미국에게서 무상으로 받은 밀가루를 자신의 이름을 붙혀서 국민들에게 지급하며 미국이 준 구호품으로 온갖 생색은 자기가 다 내었다.
이 시기는 쌀이 부족해서 술을 빚을 때는 쌀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혼분식 장려운동(이라 쓰고 강제라고 읽는다)으로 한국인의 분식 소비가 늘어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억지로 계속 밀가루를 먹게 하니 입맛이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다. 그리고 쌀소비를 줄이기 위해 식당의 밥그릇 크기를 작게 균일화 시켜버렸다. 멋대로 개인이 하루 먹을 양을 결정해버린 것이다. 이 무렵 한국의 제분공장은 모두 파괴되어 미국에서 보내온 밀을 밀가루로 만들수가 없었다. 그래서 밀을 일본에 보내서 밀가루를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일본은 수익을 얻게 되었다. 여러모로 한국전쟁이 일본의 경제 회복을 앞당기게 해주었던 것이다.
냉전이 끝나고 88서울 올림픽은 한국의 국제화, 세계화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위 공산국가인 중국과 소련과의 교류도 시작된다. 말그대로 본격적인 세계화라는 조류에 올라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반대 급부로 이때부터 미국과 서유럽의 쌀시장 개방 압력도 강해지게 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쌀시장을 부분개방했는데 이로 인해 국민들의 지지를 급격하게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화 국제화가 이뤄지면서 식품 분야에서도 세계화가 이루어졌다. 바나나 자몽 같은 열대과일이 붐을 일으키고, 육류 소비의 증가와 브로콜리, 셀러리, 피망, 파프리카 등의 서양 채소의 소비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한국은 압축성장 시기를 지나며 식품과 외식의 산업화를 이루었고 80년대의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유사 이래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국민소득 증가는 식품 소비 욕구를 자극하여 외식산업과 유흥업은 빠르게 발전했다. 그러나 97년 IMF를 맞으며 외식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실직자와 퇴직자들은 떢볶이, 김밥, 라면, 치킨, 제과제빵 등 체인점 사업에 뛰어들었고, 2000년 이후 농수축산물 시장이 완전이 개방되자 곡물의 식량 자급률마저 쌀을 제외하고 10% 이하로 떨어졌다. 식량자급률이 낮아지면서 국내 식량 공급이 해외 시장에 종속되는 식량안보에 위기가 온 것이다.
현재 한국의 식탁은 수입산으로 가득하다. 수입연어나 랍스터 같은 외산 식품의 수요가 늘어났고, 러시아산 명태나 칠레산 홍어처럼 한국의 식품이지만 원재료는 수입을 해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지금은 세계의 식품이 일방적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일명 한국의 맛과 식문화가 역으로 수출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매운맛. 유튜버들을 중심으로 매운라면 먹기 챌린지가 유행하면서 매운 음식이 젊은 이들의 문화처럼 널리 퍼졌고, 정을 나눈다는 캐치플레이즈로 유명한 초코파이나 메로나, 도시락 컵라면은 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통해 짜파구리는 전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개항에서부터 K푸드의 세계화까지 세계의 식품이 어떻게 한국으로 편입되었는지 세계 식품체제의 한반도 편입의 시각에서 알아봤는데 단순히 세계 식품의 국산화라는 측면 뿐만 아니라 21세기 K푸드를 만들어낸 힘과 식량 주권이나 거대한 공장식 농수축산물 산업, 건강한 먹거리, 팬데믹 시대의 식생활 등 당장 우리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짚어보며 앞으로의 100년의 먹거리 산업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