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정치로서 영화읽기
이황석 지음 / 베어캣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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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 영화 좀 본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영화평론가 정성일 아저씨의 방송이나 글을 한 번쯤 접해봤을 것이다. 당시 씨네필들의 정신적 지주 같았던 정성일 아저씨는 영화에 대해 말하길 영화는 세상 밖에서 만들어져서 이곳으로 도착한 것이 아니라 어떤 영화건 간에 세상 안에서 만들어져서 우리 앞에 도착한다고 말한다. 결국 세상이란 영화이고, 우리는 영화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란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영화라는 것은 세상이라는 영화를 영화라는 기계장치를 통해서 찍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삼류영화가 넘처나는 것은 그 사회가 삼류이기 때문이고, 조폭영화가 넘치는 것은 그 사회가 조폭사회이기 때문이란다. 사회가 삼류인데 일류영화가 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사기이다.


더불어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가 현실과 괴리되어 있어서 환상을 파는 것이라던지, 영화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해서 사회를 담고 있다는 식의 기계적 도식주의를 경계해야한다고도 말했지만 현실이 곧 영화이고 현실을 재가공해서 영화를 만든다면 그 영화 속에서 문화 정치적 담론의 질문으로 영화를 읽어낼 수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사회문제와 영화를 연계하여 영화를 통해 영화적 표현으로 우리 생활의 부조리를 읽어내고 있다. 이미 우리는 지난 촛불정국을 통해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영화를 통해 마치 영화같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읽어내고, 현재 한국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과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엿보고자 한다.


책에서는 한국영화와 헐리우드 영화를 골고루 다루었으며, 꼭 영화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계와 영화인 등에 대해서도 폭넓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글은 저자가 기존에 쓴 칼럼이나 세미나 등에서 강연한 내용 등을 엮은 것으로 코로나와 의료파업, 방탄소년단, n번방 사건, 일본의 경제공격 같은 비교적 최근의 핫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이슈까지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어서 시의성 있게 읽을만하다. 글의 첫머리에 그 글이 쓰여진 날짜가 나오는데 날짜를 통해 대략 그 글이 쓰여졌을 때의 사회 분위기나 어떤 의도로 글을 썼는지 유추할 수 있다. 때론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며 일반론적인 이야기에 그치는 경우도 있어서 정확히 어떤 의도로 글을 썼는지 모호한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 날짜를 통해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글의 의도를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은 특별히 정치색을 띠지 않는다. 아무래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면 개인의 성향이 드러나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런 개인적인 색깔을 최대한 거세하고, 대체적으로 정치적 성향에 빠지지 않고 일반론적인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어떤 이슈에 대해 비판을 하거나 동조하면 이미 그 자체로 그것에 반대 혹은 찬동하는 입장에 서게 되므로 의도치 않게 정치적 편향성을 나타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영리하게도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비판하거나 편들지 않는다. 양쪽 모두 똑같이 비판하는 식으로 기계적 중립을 잃지 않는다. 가령 영화 <언노운걸>을 통해 병원의 집단파업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의료진과 정부를 모두 비판하는 식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트집]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했을 때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쉬리에 이어 천만관객시대가 열린 것이 불편한 이들이 세미나를 열었다고 한다. 이 때 섬세하고 철학적인 평론으로 유명한 한 평론가가 천만관객이 가져올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태극기 휘날리며의 감독인 강제규 (책에는 굳이 이름을 빼놓았지만)를 언급하며 영화 문법도 모른다며 성토했다고 한다. 아마도 추측컨데 그 평론가는 정성일 아저씨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정성일 아저씨는 천만영화는 영화의 완성도가 아닌 멀티플렉스라는 시스템의 유통으로 이루어낸 폭력이라며 굉장히 비판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태극기 휘날리며의 편집은 역대급으로 망한 영화인 성냥팔이소녀의 재림보다 못하다며 엄청나게 깠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저자는 오히려 그런 편집이 의도된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면서 정성일(로 추측되는) 평론가는 아마도 의도된 편집임을 모를리 없음에도 그 세미나의 성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괜히 트집을 잡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일 거라고 말한다. 이것을 지난 6월 북한이 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것과 연관지어 북한의 트집을 단순히 트집을 위한 트집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긴밀하게 살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영화 '엑시트', 위험사회는 어떻게 극복되는가]
영화 <엑시트>가 개봉했을 때 헬조선에서의 청년들의 현실을 다룬 이야기라며 말이 많았다. 청년 실업 등의 사회 문제를 재난영화의 형식으로 고찰했다는 평가였는데 그러면서 헬조선, 청년실업, 청년들의 현실, 탈출, 응원 같은 키워드들이 언급되었다. 유쾌한 영화라서 특별히 뭔가를 더 심각하게 읽어내고 할 것도 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저 정도의 키워드로 현 사회를 반영한 영화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인 것 같다. 저자는 위험사회가 되는 것을 신뢰가 깨진 것에서 원인을 찾는다.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시스템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부여했고, 반성과 성찰이 없는 과잉신뢰가 오늘날의 현대사회의 지구적인 위험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신뢰가 깨진 사회를 구하는 것 역시 현대사회의 위험을 초래한 바로 우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신뢰라는 키치 아래 익명의 우리들은 서로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인 것과 동시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존재라는 희망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영화 속에 나오는 등산용 고리는 단순히 남녀의 사랑을 넘어 우리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서로의 신뢰의 고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고공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의 뉴스를 보며 이런 맥락을 읽어낸 저자의 시각이 멋있다.


[아카데미시상식서 봉준호감독이 마틴 스콜세이지를 언급한 이유]
올해 아카데미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위한 자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아카데미의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건 비영어권의 외국 영화가 작품상, 감독상을 포함해 4관왕에 올랐다는 것은 정말 이례적이고 역사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날 시상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봉감독이 감독상을 받으러 시상대에 올라갔을 때 마틴 스콜세지를 언급하며 노감독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현하는 모습이었다. 이 장면을 보며 그냥 아이고 훈훈한 모습이네 라고만 생각했는데 저자는 이런 수상 소감에 봉감독만의 디테일이 살아있다고 말한다. 마틴 스콜세지는 명성에 비해 아카데미 상복이 없다. 쟁쟁한 작품을 수없이 만들고도 번번이 상을 받지 못하다가 2007년에 디파티드로 처음으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디파티드도 훌륭한 작품이긴 하지만 솔직히 원작인 무간도보다 못하다는 의견도 많고 마틴 스콜세지의 작품 중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의견 또한 많기 때문에 더 좋은 작품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지 못한 것을 두고 말이 많았다. 저자는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상을 받지 못한 것이 이탈리아계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아카데미놈들은 엄청나게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주류 헐리우드에서는 변방에 속하는 라틴계 이탈리아의 폭력의 미학을 추구한 스콜세지에게 상을 줄리가 없었다는 거다. 봉준호는 그런 헐리우드를 향해 뼈있는 농담을 한 것이라는 거다. 정말 그런 의도로 말을 한 것이라면 봉테일 인정이다.


[영화 ‘기생충’과 ‘짜파구리’]
봉준호와 기생충 말이 나온김에 계속 기생충 이야기를 해보면 영화에 짜파구리가 나온다. 영화 때문에 외국 사람들도 짜파구리를 먹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는데 영화 속에서 이 짜파구리는 생각보다 심각한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일반적인 가짜 짜장면인 짜파게티에 너구리를 섞어서 먹는 짜파구리. 서민 음식이지만 거기에 스테이크용 등심을 때려넣어서 고급스럽게 만든 라면이다. 사모님은 막내아들을 위해 짜파구리를 만들었지만 아들이 안먹는다고 하니 남편에게 권하고, 남편도 안먹는다니 자신이 먹는다. 짜파게티는 라면 두개를 넣어서 끓였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2인분이다. 하지만 사모님은 누구와도 나눠먹지 않는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도 하지 않고 한 사람이 혼자 라면을 독식한다. 과잉에는 잉여가 발생하지만 사모님은 가정부에게 먹겠냐고 권하지만 말로만 권하고 실제로는 혼자 먹는다. 저자는 이것을 잉여의 생산물을 독차지한 자본권력의 하부에서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잉여 생산물, 이른바 떡고물을 얻기 위해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억압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주인이 갈비를 뜯고 뼈다구 하나를 던져주면 개들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낙수효과가 뒤틀리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현실은 낙수효과가 아닌 잉여물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뒤엉쳐 싸우는 개떼같은 삶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메타포라고 한다. 짜파구리에서 그런 것을 읽어내는구나.. 난 영화 헛본 것 같다.


요즘은 사실 너도나도 평론을 하는 시대라서 영화 평론가의 위치나 입지가 예전만 못하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의견에 절대적으로 동의하지도 않고 그 정도는 영화를 읽고 해석하는 유튜버들도 수없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평론가는 역시 평론가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단순히 영화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그 속에 현실 사회를 연계해서 영화적으로 읽어내는 내공이 느껴진다. 영화와 현실을 연계해서 영화 속에서 현실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정치와 문화적인 징후기호로써 읽어내는 시도를 하며 영화를 본다면 더 재미있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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