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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곤 우화 - 교훈 없는 일러스트 현실 동화
이곤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10월
평점 :

어릴 때 이솝우화를 한번쯤 읽어본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우화는 동물이나 식물 등을 의인화 하여 사회를 풍자하고 도덕적인 교훈을 주는 이야기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보편적인 지혜와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도덕적'이라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거나 가족간의 우애와 친구간의 우정 같은 기성세대들이 아이들을 앉혀놓고 설교하고 싶은 내용들을 이야기로 꾸민 것이다. 이렇게 우화는 짧은 이야기들이라 읽는데 부담도 없고, 도덕적인 교훈을 주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많이 읽힌다. 동물들이 나와서 사람처럼 말을 하고, 권선징악 같은 원초적인 주제나 나쁜 사람을 골탕먹이는 내용도 많아서 꽤나 재미도 있다. 그래서 이솝우화는 아이들이 좋아한다.
하지만 이 이솝우화가 교훈적이라는 것 때문에 아동용으로 읽히고 있지만 사실은 성인들을 향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현대의 성인에게 더 적합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세상에 찌들고 탐욕적으로 변한 성인들에게 좀 착하게 살아라고 말을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솝우화는 교훈적이고 좋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있거나 고정관념에 빠져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나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과거와 같은 흑백논리와 기존의 가치관으로 판단하기가 어려운 일이 많은데 마치 라떼는 말이야라는 느낌으로 도덕적이기만 한 이야기에 빠져있는 것에 조금은 회의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곤 우화는 이솝우화에 대응한 현실반영 성인용 우화이다. 무조건 착하게 살면 만사가 해피해진다는 기존의 일차원적인 권선징악 스토리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보는 각도를 바꾸어서 새로운 시각으로 현실에 접근하고 있다. 어릴 때는 그다지 느끼지 못했지만 성인이 될수록 점점 세상은 따뜻한 동화나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만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그런 이상적인 세상의 교훈을 주는 동화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냉혹하고도 차갑지만 우리가 매일 마주하게 되는 현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곤 우화의 내용은 차가움을 넘어 냉혹하고 처절하고, 좌절감을 맛보게 하는 것조차 있다. 그래서 읽고 나면 씁쓸함이 입안을 감돌지만 그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에 수긍하게 된다. 또 저자는 이곤 우화에 교훈 따위는 없다고 말하지만 나름의 확실한 교훈을 담고 있는 것도 있고, 기존의 속담이나 잘 알려진 이솝우화를 비틀어서 고정관념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도 있다. 사실 이런 것들이 더 큰 교훈이 될 수도 있다. 틀에 박힌 결론이 아니라 현실감 있는 감각으로 요즘 세대에 맞게 다시금 생각해보며 결국 교훈이나 삶의 방식, 인생에서의 선악이라는 것도 하나가 아니라 각자의 입장과 시선에서 달라질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런 식의 비틀린 이야기 진행구조를 너무 좋아한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틀을 깨는 것에서 우리의 생각의 깊이는 깊어지고, 가치전복적인 사고와 함께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솝우화건 이곤 우화건 우리가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들은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곤 우화는 차가운 내용과는 상반되게 너무 귀욤귀욤한 일러스트 삽화가 그려져 있어서 우화를 더욱 차갑게 느끼도록 만든다. 귀요미 삽화는 우화라는 장르적 가치를 따르고 있지만 그와 대비되는 내용은 현실과 동화의 격차를 더욱 벌려놓아서 더 큰 현실의 벽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현실은 우화보다 더욱 차갑고, 냉혹하고, 잔인하다.
내 안에 박힌 돌 조각 위에 시간과 인내가 쌓이면 진주가 된다
상처는 아프고 시간은 더디며 결과는 불확실하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반짝이는 진주를 생각하며 오늘을 견뎌낸다.
그리고, 마침내, 드디어!
- 진주 빛 노력
사회는 우리에게 노오력을 하라고 말한다. 나쁜 사장에게 갑질을 당하고 월급을 떼이는 것도 좋은 공부라고 말한다. 젊은 친구들은 노오력은 하지 않고 편한 일만 하려고 한다며 기성 세대들은 청춘들을 비난한다. 라떼는 말이야 라며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노력한 만큼 결과를 가져가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누구나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거란 허황된 희망만 심어줄 뿐이다. 진주 빛 노력은 다른 누군가의 성취로 돌아가는 일이 너무나 많다. 자본주의는 노력에 보상해주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얼마나 노력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어 얼마나 돈을 만들어내는가 하는 것이다. 노오력을 하라고 말하는 이는 껍질을 깨고 진주를 가져가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참 이상해
내가 개미일 때는 그렇게 꿈을 찾으라고 하더니
막상 꿈 찾아 베짱이가 되겠다니까 현실을 보라고 그러더라
꿈이 없어서 개미였던 것도 아니고
현실을 몰라서 베짱이가 된 것도 아닌데
내 꿈도, 현실도 아무것도 모르는 건 당신 아닌지
- 개미와 배짱이
우린 평생 꿈과 현실 속에서 방황하며 살아간다. 때론 자신의 꿈이 뭔지 모르는 일도 있고, 가난한 현실 때문에 꿈조차 가난해지는 일도 많다. 한국에서 말하는 꿈이란 직업을 뜻한다. 장래 희망, 꿈이 뭐냐고 물어보는 것은 어떤 직업으로 돈을 벌것인가 라는 의미가 된다. 직업이 꿈이 되어버린 것은 어른들의 탓이다. 그런데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학생이 많아진다는 뉴스에는 아이들이 겨우 9급 공무원에 매달려서 공부하는 것을 보며 청춘이 포부와 꿈도 없다며 한심스럽게 생각하고, 아이돌을 목표로 노력하는 아이들을 향해서는 허황된 꿈을 꾼다며 혀를 찬다. 도대체 뭘 어쩌란 것이냐?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꿈을 꾸는 방법조차 알려주지 않았으면서 스스로 결정한 청춘의 꿈을 비웃거나 비난하면 어쩌란 것인가?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은 남의 꿈은 쉽게 생각한다. 내가 해보지 않은 남의 노력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꿈과 현실은 남이 이러쿵저러쿵 말할게 아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쪽박은 깨지 말아야 한다.
어른들은 사회에서 구르다 보면 모난 곳도 둥글어진다고 했어
그렇게 성장하는 거랬어
그렇게 구르고 굴러서 둥글어지긴 했는데
많이 다쳤고, 너무 아팠어
사람들은 '성장'을 말하는데 나는 점점 더 작아졌어
- 모난 돌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고 노무현 대통령의 유명한 연설의 한 구절이다. 우리는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배워왔다. 니 성질대로 하다가는 정맞으니까 둥글둥글하게 살아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둥글둥글하다는 것은 내 개성 죽여가며 남에게 맞추고, 남의 눈치를 보고, 남의 의견에 따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성장'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정을 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지만 바위는 계란의 사정 따윈 봐주지 않는다.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약자들만이 강자들의 눈치를 보고 비굴하게 대가리를 숙인채 살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그래야 밥이라도 빌어먹고 살수가 있으니까 말이다. 꼭 이런 극단적이고 정치적인 표현이 아니더라도 성장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깎아내리고, 성질을 죽이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듣고 자랐다. 그렇게 해야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모두가 맨들맨들한 똑같은 모양의 돌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모양이 되기 위해 수없이 깎여나가야 했던 시간들. 자신을 잃고, 자아를 잃어버린 시간. 내 속에 내가 없는데 내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성장이라면 여전히 피터팬인채로 혼자 하늘을 날며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