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니체의 아름다운 옆길 - 천경의 니체 읽기
천경 지음 / 북코리아 / 2020년 9월
평점 :

철학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니체의 '신은 죽었다'란 문구는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말이 뜻하는 진정한 철학적 의미는 모르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만큼 니체의 사상은 일반인에게는 어렵게 느껴진다. 그 외에도 초인이나 힘에의 의지, 영겁회귀, 회의주의 같은 니체를 상징하는 표어들이 많이 있지만 이 역시 그 개념을 쉽게 알기 어렵다. 니체는 근대철학의 한계를 파악하고 기존의 사상을 과감하게 부정하며 현대철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니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근대철학까지 이해해야만 니체가 주장한 철학적 사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니체의 아름다운 옆길]은 니체의 철학의 개념을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와서 생활의 에피소드로 니체의 사상과 철학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생활밀착형 니체 설명서이다. 기존의 책들이 철학의 이론적 개념과 사상을 기호적이고 수사적으로 설명한데 반해 여기서는 우리의 생활을 니체의 개념으로 실증적으로 풀어서 해설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피부에 와닿고 쉽게 이해된다. 철학을 이해한다는 것이 나에 대해 이해하고, 나의 생활에 조금이라도 녹아들길 바라는 마음에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인데 너무 어려운 이론서는 이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니체를 생활 에세이처럼 접하니 철학이 우리의 일상으로 파고들어 우리가 철학을 알고자 했던 그 목적에 그대로 부합하여 실용적으로 느껴진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니체는 신을 죽인 것은 교회의 짓이라고 말했고 교회는 신의 무덤과 묘비라고 했다. 신을 죽이기 위해선 그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하기에 니체는 신을 죽인 행위를 위대한 행위로 평가했다. 그런데 교회의 잘못된 행태가 신을 죽이고, 인간이 신의 손을 벗어나게 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위대한 행위란 뜻인가? 니체가 말한 위대한 행위라는 것이 반어법적인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교회가 사람들을 신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 실감한다. 일부 교회라고는 하지만 교인수가 엄청나게 많은 주류 대형 교회가 신을 모욕하는 온갖 타락한 행태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신을 죽인 것은 교회가 맞다. 니체는 중세 이래로 타락한 기독교와 사제의 행태를 비판했었는데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교회는 타락한 채로 머물러 있다.
신이 죽었다는 것은 신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가서 주체적으로 삶의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휴머니티와는 다른 개념으로 내가 내 인생의 창조자가 된다는 의미이고 우리 자신이 삶의 전면에 나서야 함을 뜻한다.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내린 자유의지의 최고의 발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한한 자유가 열리면 사람은 두려워하고 혼돈의 시간이 뒤따른다. 매순간 일에 치여 힘들게 살던 사람에게 잠시동안의 조용한 휴식의 시간이 주어지면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서 불안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인간을 옥죄던 신이 사라지면서 혼돈이 발생하는데 이런 카오스가 곧 복음이 된다고 말한다.
신이 죽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초인으로 살 수 있다. 위버멘쉬. 인간을 넘어선 인간, 자신을 극복한 자신, 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인간 등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는데 그런 측면에선 부처가 위버멘쉬의 모델에 가장 근접해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초인은 자신의 힘 의지로 사는 사람인데, 자유정신의 소유자, 자기를 넘어선 존재라 한다. 이 말은 하고 싶은대로 하며 자기 멋대로 사는, 자존감 강한 사람도 초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지 않고, 무한 긍정의 삶을 사는 것이 초인이라면 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초인이 될 수 없는 것일까?
나, 이 같은 자들의 귀를 위한 입이 아닌가 보다
나, 저들의 자부심에다 대고 말하련다
나, 저들에게 더없이 경멸스러운 것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 말종이 그것이다
니체가 인간 말종이란 니체가 가장 경멸한 교양인을 뜻한다고 한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 어째서 인간 말종이란 말인가? 인간 말종은 동경의 화살을 더 이상 자신의 너머로 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경멸스러운 인간이라고 한다. 인간 말종들은 행복을 위해 필사적으로 덤벼들고, 이웃을 사랑하고, 병에 걸리는 것을 죄로 생각한다. 매사에 조심하고, 단 꿈을 꾸고, 손익 계산과 유불리를 철저하게 따진다. 한편으로는 굉장히 착실하고 건실한 지역사회의 일꾼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위선자처럼 보인다. 가짜 행복을 만들어내며 자신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고, 거짓 사랑과 마비와 중독으로 행복에 이르는 위선자.
현대의 보편적인 교양인들, 즉 인간 말종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일 뿐이고,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행복이라는 가짜 가치를 내세우며 그것을 숨긴다. 요즘 힐링이나 소확행이란 말이 유행하는 것도 결국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한 환상이라는 뜻이다. 힐링이나 소확행이란 말이 유행한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현실이 작고 초라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것에 빠져 있는 한 미래에 대한 꿈을 잊게 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현실을 은폐하는 도구이자 그 자체로 기만일 뿐이다. 이런 것을 쫓는 사람들은 인간 말종이다.
요즘 아이들은 꿈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래서 뭔가 도전하고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 보단 안전한 공무원이 되려하고 복세편살이 모토가 되었다. 삶의 질을 높이는 돈, 명예, 지위에만 목을 매고, 좋은 외모를 위해 그루밍에 열을 올린다. 니체의 관점에선 이런 애들은 죄다 인간 말종이다. 위버멘쉬는 안주하지 않고, 자기를 경멸하고, 매순 간 상승하여 완성하고, 넘쳐흐르는 영혼을 가진 자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아프니까 청춘이고,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으라고 하는 전형적인 꼰대 마인드라고 하겠다.
태양이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데는 아무런 조건도 이유도 없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해서 아무도 태양에게 감사해하지 않는다. 호의가 계속되니 호구가 되는 상황이다. 니체는 이것이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주려면 생색내고, 구걸하게 해서 아쉬운 소리를 하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사람은 고마움을 안다고 한다. 말하자면 보편적 복지 같은건 위선이고 아이들에게 무상급식을 시켜주려면 자신의 가난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떼오고, 엎드려서 배가 고프니 밥을 달라고 구걸을 하게 해야한다는 거다. 그래야 고마움을 알고, 고개를 조아리고, 커다란 효용으로 보답을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음수사원. 니체의 사상은 대한민국의 극우의 사상과 맞닿아있는 것인가?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인간 말종의 길 대신 위버멘쉬의 길을 걷는다면 그 길로 호적에서 파내지고, 왕따가 되고 만다. 애초에 짜라투스트라에서 말하는 사람은 광인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광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꼰대 극우의 위버멘쉬가 될 것인지, 위선적이라도 현실에 만족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인간 말종으로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니체의 사상은 이렇게 단순하게 양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니체는 어렵다. 알수록 어려운 것이 니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