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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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베르는 첫작품인 개미 때부터 좋아하던 작가다. 기발한 상상력과 기존의 사고를 뒤집는 시선으로 이야기를 색다르게 이끌어가고, 흥미롭고 색다른 주제로 호기심을 자극하여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며, 뛰어난 이야기꾼이라 흡입력있게 글을 쓴다. 그래서 순수하게 재미라는 측면에서 보면 베르베르의 소설은 나무랄 때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작품인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 신으로 이어지는 3부작을 가장 좋아하는데 사후 세계와 환생, 신에 대한 이야기를 동양적인 관점과 서양의 시각을 믹스해서 탈종교적인 세계관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환생과 영계라는 것은 분명 동양적인 사상에 기인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베르베르 소설은 전통적인 기독교 사상에, 동양적인 철학과 고대의 종교와 신화 등도 차용하여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내었다. 이 점이 베르베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어느 특정 종교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모든 종교의 뿌리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전제가 된 것 같다. 어쩌면 한가지의 사상에 전도되지 않기 때문에 기발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주제를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신작 <심판>은 폐암으로 죽은 주인공이 천국의 재판정으로 가서 변호사를 대동하고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재판을 받는 것이 기둥 줄거리이다. 말하자면 베르베르 버전의 신과 함께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다만, 동양의 정서로는 6도윤회 사상에 입각해서 선업을 쌓고 착하게 살았다면 천상(천국)으로 가고, 선행포인트에 따라 인간, 수라계에서 환생하거나 축생, 아귀계나 지옥에 떨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베르베르가 만들어놓은 심판의 세계에서는 천계의 재판정에서 유죄가 내려질 경우 피고는 다시 환생을 하는 벌을 받는다. 즉, 우리의 현실이 벌을 받는 형벌장인 셈이다.


이 작품의 설정은 초기 작품인 타나타노트와 천사들의 제국, 신으로 이어지는 소위 타나토노트 3부작에서의 컨셉과 맞닿아 있는 내용들이 보이는데 현생의 인생은 전생의 '내'가 미리 선업포인트에 따라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작품에선 선업포인트라는 개념은 없지만 전체적으로는 내가 나의 다음 인생의 전체적인 틀을 짜놓고 그것이 나의 카르마로 작용하게 된다는 설정은 동일하다. 나의 성격, 직업운, 연애운, 부모운, 장점과 단점, 질병까지 현생의 내 상태는 모두 전생의 내가 선택한 '옵션'이라는 거다. 그러니 자신의 인생이 엉망이라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원망하려면 자신을 원망해야 하는 것이다. 타나토노트 3부작에 저 내용이 나왔을 때 상당히 신선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라 깊게 각인되었었는데 다시 그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주인공은 재판장 가브리엘에게 자신이 좋은 학생, 좋은 시민,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좋은 직업인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윤회의 업보에서 빠져나와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다. 하지만 자신만만하던 것과는 달리 주인공은 여러모로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다시 태어나는 벌을 받게 된다. 책의 내용 중 한가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부분은 주인공이 누가 보기에도 뚱뚱하고 추해보이는 여자와 결혼한 것을 두고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검사는 판사 출신의 잘나가는 주인공이 뚱뚱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며, 일생을 통해 어떠한 것도 이루지 못한 <멍청이>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은 아내를 만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권태기가 왔는데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며 차라리 바람이라도 피워서 아내에게 자극을 줬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울리지 않는 상대에게 충실한 것은 상대의 삶을 망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망치는 일이라고 말한다. 바람을 피워서라도 아내를 자극해서 부부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취지인데 이게 맞는 말일까? 이거야말로 바람 피는 남자 혹은 여자가 자기변명을 위해 내뱉는 비루는 변명 아닌가? 섹스를 하라고 있는 성기를 왜 사용하지 않고 왜 기본적인 쾌락을 스스로 차단했느냐고 검사가 주인공을 나무라는데 그럼 반대로 섹스하기가 너무 싫으니 차라리 밖에 나가서 딴 여자랑 잠자리를 하고 오라고 말하는 여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바람을 피워서라도 아내를 자극하라고 했는데, 아내가 차라리 바람을 피라고 종용하는 것은?


잘난 남자는 예쁜 여자와 결혼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자연의 섭리인가? 잘 생각해보면 맞는 것도 같다. 동물 세계에서 암수가 짝을 지을 때는 항상 강하고 쎈 수컷이 암컷을 차지하게 된다. 숫놈끼리 싸워서 이긴 최종승자가 암컷을 거느리거나, 암컷의 마음을 얻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을 하기도 한다. 공작의 화려한 꼬리장식, 사자의 멋진 갈기, 큰 뿔이나있는 영양. 가장 멋진 녀석이 짝짖기에 성공한다. 인간으로 따지면 원빈이 이나영과 결혼하고, 장동건이 고소영과 결혼하는 식이다. 열성인자를 가진 <멍청이>와 짝짖기를 하는 것보다 가장 강하고 힘있고 멋진 녀석이 멋진 암컷과 짝짖기를 하는 편이 우성 인자를 가진 개체를 생산했을 때 종족보존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어쩌면 잘난 남자가 잘난 여자와 맺어지는 것은 자연이 섭리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자연의 오랜 섭리를 깨트린 것이고 말이다. 말하자면 이런 맥락인 것 같은데 이것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못난 남자, 못난 여자는 연애도 결혼도 못한다는 소리다.


좋은 직업인이었냐는 질문에 주인공은 물론 스스로 좋은 직업인이었다고 강변한다. 주인공은 살아있을 때 판사였고, 굉장히 많은 재판을 맡아 처리했었다. 하지만 너무나 빠르게 일처리를 했었고, 그 과정에서 인정을 보일 수도 있는 케이스의 피고에게 중형을 내리기도 하고, 정치적 외압에 의해 중범죄자를 풀어주기도 했었다. 빠르고 타성에 젖어 판결을 내리던 주인공은 빠르게 일처리를 하려는 의사에게 수술을 맡겼다가 결국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판사로서 타인의 잘잘못을 따지던 입장에서 피고가 되어 잘잘못을 판정받는 입장이 된다. 사고의 전복.


기존 질서의 전복이 베르베르 소설의 특징이다. 이번 이야기에서 가치전복된 가장 의외의 장면은 것은 검사가 말하는 주인공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내나 방임했던 아들과 딸, 잘못된 판결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인공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생의 나의 인생에는 전생의 내가 만들어놓은 목표치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현생의 나에겐 전생의 내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루어야 하는 일종의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어려운 일을 넘긴다는 말이 유행했는데 마치 그것처럼 현생의 꿈을 다음생의 나에게 전승하는 것이다. 이것이 카르마로 현재의 나의 인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 전생의 내가 만든 카르마는 현생의 인생에 25%의 영향력을 가지고 내 인생을 개척하는 자유의지는 50%의 영향력을 가진다. 말하자면 현생의 삶은 전생의 내가 원하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데 전생의 내가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살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배신한 것이자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전생에 내가 어떤 삶을 원했건 현생의 내 삶은 현생의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라고 50%나 되는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전생에 내가 25%의 확률로 짜놓은 완벽한 인생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나는 유죄인 것이다. 내 자유의지는 나의 의지를 역행하는 것이고,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은 내가 살고자 했던 삶과 다르면 아무리 성공해도 그건 실패가 된다. 아니면 현생의 의지로 성공을 한다해도 그 성공은 맥시멈 50%이지만 전생에 만들어 놓은 계획대로 자유의지를 사용했다면 25%의 카르마까지 더해져서 맥시멈 75%의 성공을 취할 수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겠다. 전생의 꿈은 현생에서도 꿈이나 이상으로 드러나는데 그 꿈을 쫓지 않고 현실과 타협하거나 한다면 그건 스스로의 꿈을 배신 하는 행위라는 뜻도 되겠다. 결국 베르베르가 하고자 하는 말은 현실과 타협하지 말고, 아무리 힘들어도 꿈을 쫓아라. 그것이 너의 영혼을 구원하리라. 대략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같다.


전체적으로는 연극적인 분위기로 구성되어졌다. 기존의 소설들이 마치 영화적인 구성을 연상시켰다면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연극 무대를 배경으로 마치 연극 공연을 하듯 희곡적인 느낌으로 진행시키고 있다. 그래서 작 중에 천사들이 주인공의 재판을 관람하는 설정이 나오는데 독자가 마치 천사가 되어 그 재판을 관람하는 느낌으로 이야기에 들어가서 함께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환생이라는 베르베르스러운 주제로 자신의 인생과 운명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재미있는 소설로  전작들보다는 무겁지 않고, 복잡한 내용도 없어서 가볍게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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