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철학자 - 교양인이 되기 위한 철학 입문서
김이수 지음 / 단한권의책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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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일신상 큰 고민이 있을 때, 중2병에 걸렸을 때, 사람과 사랑에 대해 고민할 때 등 다양한 이유로 철학을 필요로 한다. 철학이 실제로 그런 고민과 선택에 직접적인 해결책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꿔서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준다. 또 철학적인 성찰은 삶에 대한 의미와 인생의 가치 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해서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철학이란 나의 내면을 성장시키는 영혼의 자양분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서적으로 좋고, 삶에 대한 고찰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한들 어려워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철학은 어렵고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혼자서 책을 읽으며 독학하기란 참 쉽지가 않다. 우선 철학의 역사가 너무 오래되고, 철학자들도 많아서 그 오랜 역사를 전부 훑어가며 철학자들의 철학 사상을 다 이해하기란 초심자에겐 불가능에 가깝다. 의욕적으로 철학사를 읽어보려해도 어려운 용어들과 복잡한 철학사상에 가로막혀 중간에 포기하는 일이 많았다.


이제 막 철학에 발을 들이는 초심자에겐 복잡한 철학의 계보나 어려운 철학 개념이 아닌 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철학서가 필요하다. 그리고 긴 철학사를 따라가며 이름을 올린 모든 철학자를 살펴보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처음에는 비교적 잘 알려지고,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고 있는 철학자들의 가르침과 철학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철학을 접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처음 만나는 철학자]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철학자부터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니체 같은 현대의 철학가, 그리고 공자, 노자, 맹자, 장자 같은 동양의 대표적인 철학자 등 동서양의 인지도가 높고 많은 사람들이 알만한 15명의 대표 철학자들과 그들의 철학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너무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 식상할 수도 있고, 왜 많이 알려진 유명한 철학자만 다루는 거냐고 반감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사상이 중요하고, 철학사 중에서도 큰 영향력을 가진다는 뜻도 되겠다. 그러니 이들을 중심으로 철학에 첫 발을 내딛는 것은 좋은 선택이라고 보여진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이란 무엇인지, 세계란 무엇인지,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과 내면을 탐구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하고 해답을 구하고자 했다. 이것 질문이 결국 철학이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동양의 사상가들은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존재와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을 하고, 서구의 철학가들은 개인과 함께 나를 둘러싼 세상, 사회, 우주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니지만 동양사상은 자연 속에서의 삶의 자세를 중시한다면 서양사상은 자연을 이해하고 탐구하려는 시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자는 마인드와 자꾸 뭔가를 증명하고, 분석하고, 알아내려는 마인드의 차이인 것이다. 공자는 순리대로 살며 세상을 보는 법을 말하고, 맹자는 사람답게 사는 길, 장자는 자유롭게 사는 길, 한비자는 현실적으로 사는 길. 이렇게 동양의 철학자들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질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람의 법은 땅이고, 땅의 법은 하늘이며,
하늘의 법은 도이고, 도의 법은 자연이다


노자는 최고의 선이 물과 같다고 말한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이는 자연의 법칙을 가장 잘 보여주는 현상이다. 法이란 한자는 물수변(水)에 갈거(去)가 합쳐진 말로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법도라는 의미가 된다. 물흐르듯이 자연의 법칙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자 인간이 지켜야할 법도라는 주장이다. 도덕경에 나오는 저 말은 일견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인간으로 흐르는 종속적인 흐름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자연이라는 큰 시스템에서 보면 저마다의 위치에서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일부분이기에 모두가 자연 그 자체라고 보고 있다. 인간이 땅이나 하늘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분이자 자연 그 자체라는 생각이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보지만 노자는 인간이 아닌 자연, 우주를 중심으로 해서 사람을 보라고 가르친다.


우주의 관점에서 인간의 존재는 작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우주 전체를 중심에 두고 인간을 생각하라는 말이 인간은 하찮다는 뜻처럼도 들릴 수 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람 한사람 한사람이 우주와 같은 큰 존재이고 큰 가치를 가진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의 본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물처럼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것이 가장 큰 선이라고 가르친다. 노자는 무위를 인간의 덕이라고 말했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연을 따르지 않고 인간 개인의 욕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덕이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약간 자연인 옹호론자라고나 할까


노자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또 있는데 바로 장자되시겠다. 장자는 노자와 비슷한 사상을 펼쳤기 때 이 둘은 콤비로 묶여 '노장사상'이라고 말해진다. 장자는 '무용지용론'이라는 것을 주장했는데 쓸모가 없음이 쓸모가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영화 황산벌을 보면 계백 장군이 황산벌로 떠나기 전 자기 식솔에게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는 것이여' 라고 말하며 약을 먹고 죽으라고 하자 계백의 처가 말한다. '말은 바로하소,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는 것이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과일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과일을 따게 되는데 이때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긴다. 아름드리 훌륭한 재목이 될 나무라면 목수에 의해 베어지고 만다. 과일나무는 과일이 열림으로서 고통을 당하고, 재목이 될만한 멋진 나무는 그 쓰임새로 인해 일찍 죽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이름 때문에 죽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으로 아무런 재능이 없다면 그런 화를 당하지 않을 것이니 천수를 누리게 될 것이다. 화를 입지 않고 천수를 누리는 데에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아이러니.


사람들은 화려하고 삐까뻔쩍하는 것을 바라고 동경한다. 하지만 화려한 삶의 이면에는 모르고 있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으니 그것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는 깊고, 빌딩이 높을수록 그림자는 길어지는 법이니 말이다. 우린 화려한 연예인을 동경하거나 강남 건물주를 부러워하지만 그들에겐 우리가 모르는 그들만의 어려움과 고민이 있으니 굳이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해도 좋으니 한번이라도 그런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어떻게 설명할건가요 장자 어르신) 장자의 무용지용론은 부자에게도 서민들이 모르는 고민이 있다는 식으로 사물의 한쪽 면만 보지 말고 다양하게 볼 것을 가르친다. 장자에 비하면 노자는 조금 더 개인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것 같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던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었던 것일까
장주와 나비는 서로 다른 것이건만 그 구별이 애매함은 무엇 때문일까?


장자는 우물안 개구리, 무용지용론 외에도 또 하나의 걸출한 명언을 남겼는데 그 유명한 호접지몽이다. 장자는 정말 명언제조기다. 호접지몽은 많은 영화나 소설 등 수많은 콘텐츠에서 재활용 되며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호접지몽은 물아일체의 경지이자 꿈과 현실, 나와 기억의 구분이 없어지는 도의 세계를 말한다. 장자가 말하는 이 도의 세계는 집착하지 않고, 이름과 몸의 안위에 연연해하지 않는 삶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장자의 또다른 가르침인 소요유로 이어진다. 장자의 핵심 사상이기도 한 소요유편은 도에 대한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 소요유란 천천히 거닐면서 놀다, 유람하다는 뜻으로 천천히 거닐면서 노니는 안빈낙도, 욜로의 자세인 것이다. 안빈, 비록 가난하지만 낙도, 도를 즐겁게 즐긴다는 뜻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 현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세상의 기준에서 자유로워지고 낙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무용지용론의 정신과 이어지며 화려한 것을 바라지 말고, 세상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즐기며 살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안빈낙도는 공자의 말이지만 이를 잘 실천한 것은 장자인 듯 하다.


니체는 2,000년이 넘는 철학의 역사에 있어서 상상할 수도 없는 반란자라고 한다. 망치를 든 철학자로 불리는 니체는 철학을 어렵거나 고상한 것이 아닌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필요한 옷가지와 가면이라고 생각했다. 철학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비교를 통해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라고 말했다. 자기객관화를 통해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니체의 사상은 '힘의지. 초인, 영원회귀' 세 가지로 정의되는데 이 세 가지 개념은 서로 연결하여 이해해야 한다.


네 행동의 원칙이 늘 보편타당한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


힘의지는 세상 모든 생명이 가니는 근원적인 에너지이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더 나은 상태로 한 단계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이 의지가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 원리라고 니체는 생각했다. 힘의지는 누구가 가지고 있고 우리가 사는 현실이란 여러 힘의지가 얽힌 지배와 굴종의 세계이다. 니체는 이 힘의지를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믿음과 이성만을 긍정적으로 보고, 힘의지가 표출되는 다른 모든 인간적인 면은 금욕과 절제를 통해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체에게 있어 신앙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힘의지에 불과했고, 신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희생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면 니체는 반골이니까. 신앙은 천국으로 가기위해 현실의 고통을 참고 인내하라고 하지만 니체는 숨기지 말고 고통스럽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의 힘의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고 인정이다. 잘났건 못났건, 즐겁건 괴롭건, 유쾌하건 불쾌하건 난 나다. 신이 아니라 자신을 믿음으로써 인간은 더욱 자유롭고 강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너 자신이 되어라!는 힘의지에 근거하여 나 자신이 된 것이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다. 초인은 나만의 도덕을 갖는다. 일반적인 도덕은 개인이 속한 단체의 본능이기 때문에 도덕적 믿음은 집단의 믿음일 뿐이라 개인의 힘의지에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만의 도덕으로 자신을 믿고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인간을 뜻한다.


​모든 것은 사슬처럼 연결되어 서로 뒤얽혀 있으니까.

모든 것은 사랑 속에 있으니까, 만일 네가 한 순간을 두 번 바란 적이 있다면,

"오 제발, 이 순간, 이 행복한 순간을 다시 한 번!"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너는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바란 것이다!


니체는 시간은 현재의 나에게 속한 성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기준이 되고 시간이라는 것도 현재 나에게 속한 성질이라는 것이다. 철저히 '현재의 나'가 중요하다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도 시간이 아니라 그 순간을 사는 현재의 나이다. 순간에 집중하는 현재의 나에게 순간은 곧 영원이 된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는 순간의 연속이다. 모든 것이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사랑 속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사랑 속에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나의 관심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비로소 꽃이 되었다' 내가 관심을 가져야만 비로서 의미가 생긴다. 니체는 인간은 귀한 존재고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집중하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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