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 조선의 왕들, 주역으로 앞날을 경계하다 더 생각 인문학 시리즈 13
박영규 지음 / 씽크스마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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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운명을 예측하는 학문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주역과 사주명리학이다. 가끔 이 두 가지를 혼돈해서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주역의 원리는 2진법에서 출발한 하늘과 땅, 물과 불, 바람과 우레(천둥), 산과 연못 등 자연현상을 상징하는 여덟 가지의 기호를 중첩시켜 64가지의 괘를 만들고, 그 괘 각각에 의미를 붙여 인간의 길흉화복을 판단하고, 예측하는 것이다. 주역은 현재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사실상 일반에게는 돗자리 깔고 점괘를 보는 점장이 정도나 시대착오적인 미신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왕조시대 때는 이 주역이 제왕학의 교과서였다고 한다. 중국의 황제들은 국가 경영에 이 주역의 원리를 활용하였고, 조선의 왕과 선비들도 주역을 탐독했다고 한다. 특히 환란을 당했을 때는 더욱 주역의 힘을 많이 빌린 것 같다. 아마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주역에게 지혜를 얻으려 하는 행동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점장이들의 점괘처럼 치부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역의 괘 모양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는데 그 원리만 파악하면 쉽게 깨우칠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원리를 아는 것보다 그것을 보고 괘 안에 담긴 메세지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때부터는 상상력의 싸움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확정적이지 않고, 생각하기에 따라 의미가 달라는 점 때문에 반은 수학 공부이고, 나머지 반은 인문학 공부라고 한다. 말하자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식인데 결국 주역을 해석하는데는 임금이나 선비 개인의 사상과 가치관이 해석의 영역에 들어간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가령 지금으로 치면 주역의 괘를 진보성향인 사람이 보면 진보적으로, 보수인 사람이 보면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식이 아닐까 싶다. 즉, 백성을 위하고, 좋은 정책을 많이 펼친 임금은 아마 주역이 없었어도 좋은 정책을 펼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주역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1000여건이나 담겨있다고 한다. 정조, 영조, 숙종, 세조 등 조선의 모든 군왕은 주역을 통해 신하들과 소통하고 민생을 돌봤다고 한다. 정조는 규장각 설치, 인사문제, 영농문제, 상업개혁 등 국정 운영 저난에 주역을 활용했고, 이순신 장군은 주역을 활용한 전략전술을 구사하여 왜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책에는 정조, 영조, 세조, 숙종, 세종, 성종, 광해군, 연산군, 이순신 등 16명에 대해 주역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장군이 주역 점을 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고 한다. 최고의 전술가이자 지략가인 이순신 장군이 주역으로 점을 쳤다는 것은 굉장히 생소하고 이미지와 잘 맞지 않는다. 컴퓨터 두뇌로 전장을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전술을 세웠을 것 같은데 주역으로 점을 쳤다니. 어느 날은 하루에만 세 가지 사항에 대한 점괘를 뽑은 날도 있다고 한다. 비가 내릴 것인가에 대한 점을 쳤는데 점괘대로 다음날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자 자신의 점괘가 절묘하다며 스스로 감탄했다고 한다. 좀 인간적인 면이 느껴져서 귀여우시다.


이외에도 점을 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길조의 점괘가 나왔을 때는 아내의 병이 낫거나 곽재우 등과의 수륙 연합 작전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왜국이 물러가거나, 풍신수길이 죽는 등의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이순신이 백의종군 할 때 원균에 대한 점을 치는데 흉괘가 나오자 원균이 대패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의 점괘는 의외로 꽤나 잘 맞는 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게 될 운명에 대한 점을 봤다는 기록은 없다는데 저자는 영웅도 자신의 최후를 내다보지 못했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조차 알고도 글을 적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세종대왕은 공부의 신, 공신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어 일찌감치 문리를 터득했고, 그래서 어전회의나 경연에서 신하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간의대, 측우기 등의 과학 기기들을 발명할 수 있었던 것도 독서 이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과, 이과 통합 올라운드 수제였던 것이다. 이렇게 학문적 소양이 뛰어나다보니 당연히 주역에도 능통했던 모양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주역은 수학과 인문학에 많은 영향을 받는데 문과, 이과 통합 공신인 세종대왕이 주역에 능통한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세종의 어릴 시절 세종의 동생인 성녕대군이 병에 걸렸을 때 세종이 주역의 점괘를 정확하게 풀이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왕조에서 두 명의 폭군 연산군과 광해군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광해군의 경우는 광해군일기에 주역을 따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상황에 맞게 주역을 인용하며 신하들과 소통하고 정치를 살피는데반해 연산군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연산군일기에도 주역에 대한 에피소드가 수십 건 등장하지만 연산군은 단 한번도 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적이 없는 것으로 봐서 아마 연산군은 주역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은 국정에 대한 의제를 놓고 신하들과 자유토론이 가능했지만 연산군은 그런 식견이 없었던 것이다.


책을 처음 시작할 땐 주역은 해석의 학문이라고 하길래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다가 그 점괘를 잘못읽고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점괘를 읽을 수 있는 식견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생각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즉, 주역을 읽고 분석할 정도의 교육수준과 식견이 되어야지 비로서 국정을 논하고 전장에서 필승의 전략을 짤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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