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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화원을 거닐다 - 당신의 꽃은 무엇인가요? ㅣ 조경기사의 식물 인문학 1
홍희창 지음 / 책과나무 / 2020년 7월
평점 :

이규보는 고려시대의 문인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평생 8,000여편이나 되는 시를 지었다고 알려졌는데 운을 부르자말자 바로 나는 듯이 일필휘지로 시를 써내려갔기 때문에 '붓을 달려 시를 쓴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의 천재 시인이었다고 한다. 이규보는 꽃과 나무를 사랑하여 과수의 접을 붙인 이야기인 '접과기'나 초당의 작은 정원을 정리하는 내용의 '초당이소원기', 꽃 심는 즐거움을 다룬 '종화' 같은 시를 쓰기도 했다. 그외에도 맨드라미, 석류꽃, 배꽃, 해당화, 홍작약, 금전화, 동백꽃, 국화, 장미, 옥매화 등의 꽃을 읊은 시도 많이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이규보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 등에 나오는 2천 편이 넘는 시들 중 꽃과 나무, 과일과 채소를 대상으로 쓴 시를 골라 소개하고, 조경기사인 저자가 그 시 속의 꽃과 나무의 특성과 키우는 법 등을 설명하는 독특한 형식의 식물 인문학 도서다. 먼저 이규보의 시로 운을 떼고, 저자가 시를 받아서 먼저 시를 간략하게 설명한 후, 시에서 읊었던 꽃과 나무의 크기, 개화시기, 원산지 등의 특징을 설명한다. 그리고 꽃과 식물에 대한 상징과 예술 작품 및 역사 속 문헌에 나오는 내용을 인문학적으로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각각의 재배정보를 상세하게 알려준다.
향기로운 이슬 소야거를 적시며
한 꽃가지가 가볍게 흔들리며 새벽바람에 비껴 있네
금원의 복사꽃 오얏꽃은 모두 무색한데
홀로 궁중의 해어화를 대적한다네
목작약은 모란을 작약 꽃에 비유한 것으로 당나라 때 불린 이름이라고 한다. 모란 aka 목단은 중국이 원산지로 화투의 6월 그림으로 사용되고 있다. 모란은 붉은 꽃 백 송이가 비단 25필 값이었을 만큼 진귀한 꽃이었다고 한다. 선덕여왕의 일화에도 이 모란이 나오는데 당나라 태종이 모란 그림과 씨앗을 보내왔는데 선덕여왕이 그림의 꽃을 보고는 꽃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꽃은 이쁘겠으나 향기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나중에 꽃을 피워보니 정말 그렇더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모란은 고려로 넘어오면서 미인을 상징하고 부귀영화를 염원하는 꽃으로 사랑받았다. 고려의 임금들은 모란을 애호했으며 이규보 역시 모란을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고려청자 상감과 생활 도구의 꽃무늬는 대부분이 모란이다.
춘삼월이라 봄바람에 곱게 핀 온갖 꽃이
가을 한 떨기 국화만 못하구나
향기롭고 고우면서 추위를 견디니 더욱 사랑스럽고
더더욱 말없이 술잔 속에 들어오니 정다웁네
국화는 중국이 원산지로 화투의 9월 모델이다. 꽃이 적은 가을, 서리가 내린 뒤에도 꽃이 피므로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로 불리었는데 다른 꽃들이 피어나는 봄이나 여름을 피하여 황량한 늦가을에 고고하게 피어나서 가을 찬바람이 부는 벌판에 홀로 당당히 피어나는 국화의 모습이 마치 고결한 은둔 선비와 같은 이미지를 연상시켜서 수많은 시와 수묵화의 작품 소재로 쓰였다. 그래서 국화는 국자, 은자를 상징한다. 그리고 국화는 불로장수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불로장수하기 위해 국화를 식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국화는 유배를 간 가난한 선비의 식량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삼국 시대 때부터 관상용으로 애용되었고, 일본에 청·황·적·백·흑 5색의 국화를 보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가지 변종을 애식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좋을까 저 오얏꽃
빈 뜰에 눈같이 피었다
성이 같은 나무라 가장 사랑해
지난해와 같은 꽃이 피었다
푸른 잎이 처음에 서로 비추더니
아름다운 자태 갑절이나 더하다
이 봄에 구경하지 못하면
즐거운 일이라 뉘에게 자랑하리
자두나무는 오얏나무라고도 불린다. 복숭아·살구·밤·대추와 더불어 와과 중 하나로 귀한 과일로 여겨졌다고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삼국사기에도 기록이 있어서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추측된다. 오얏과 관련된 속담이나 격언도 많은데 오이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고, 자두 나무 아래에서는 모자를 바로잡지 말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시 구절에 성이 같다는 말이 나오는데 오얏꽃은 題李花이라고 한다. 李는 우리말로 오얏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자두나무를 의미한다. 오얏과 이씨 성이 같은 것으로 신라말의 예언서 도선비기에는 5백년 뒤 오얏, 즉 이씨 성을 가진 왕조가 들어설 것을 예언하기도 했다.
가느다란 손이 오므록이 몰려선 듯
아이들 잎을 따서 피리처럼 불어 보네
술자리에 안주로만 좋은 것이 아니라
고깃국 끓일 때는 더없이 맛나도다
이규보의 시 중에는 꽃이나 나무 뿐만 아니라 특이하게 파에 대한 시도 있었다. 매화나 국화 같은 것은 시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지만 파에 대한 시가 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어쩌면 꽃을 대상으로만 시를 쓴다는 것도 선입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규보는 자연의 모든 것을 노래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진정한 자연인이라 할만하다. 파의 원산지는 중국이고, (죄다 중국에서 들어왔지 뭐) 통일신라 시대부터 재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시 구절에도 나오듯이 술자리에서는 안주로, 고깃국에도 파를 이용하며 다양하게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여 두면 여름에도 좋은 반찬이요
김장 담가 겨우내 먹을 수도 있구나
땅 밑에 자리 잡은 큼직한 뿌리여
드는 칼로 쪼개 보니 연한 배 같구나
이번엔 무에 대한 시다. 앞서는 파, 이번에는 무 그리고 가지나 미나리, 아욱, 토란 같은 것으로도 시를 지었는데 소재 선택 취향이 개성있다. 시를 8,000편이나 지었으니 흔히 시의 소재로 사용되는 국화나 대나무 따위로는 글을 쓸만큼 다 써서 더 이상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니 이런 소재로까지 시를 쓴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그렇게 똑똑했지만 벼슬을 하지 못하고 한량으로 살다보니 그냥 밥 때 되면 밥 먹고 밥상에 오른 반찬을 보며 요즘 사람들이 밥 먹기 전에 사진 찍어서 인스타 올리듯이 밥 먹기 전에 반찬으로 시 한수 읊고 밥먹고 그랬던 것은 아닐까?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채소는 배추 다음으로 무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무의 재배 역사는 채소 중에서도 오래된 편이라고 한다. 한국에선 통일신라 시대 때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