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고전 살롱 : 가족 기담 - 인간의 본성을 뒤집고 비틀고 꿰뚫는
유광수 지음 / 유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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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고전이야기의 다시보기, 거꾸로보기, 재해석하기 같은 시도는 그동안 많이 있어왔다. 이야기 속에 담긴 숨은 함의를 찾아내거나, 시대상을 반영하여 이야기의 속뜻을 읽어내거나, 아동용으로 각색되기 전 원래 스토리를 알아본다거나, 고전 스토리를 현대적으로 각색하여 생각하거나, 둘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났는데 정말 행복하게 살았을지 그 뒷이야기를 생각해보는 등 다양한 형태로 고전을 재해석하며 읽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 책처럼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것은 정말 처음이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 흥부는 왜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애들만 줄줄이 낳았나 같은 우스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런 의문에 대해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해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것은 좀처럼 없었다. 한술 더 떠서 그것에서 인간의 본성을 고찰하고, 이야기를 가족문제의 영역을 옮겨서 당시 사회적 가치였던 가부장제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시도는 아주 새롭고 흥미롭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어릴 적 이런 고전을 통해 배운 교훈들이 사실은 이야기의 단편적인 부분만을 취한 것이거나, 이야기가 진짜 하고자하는 것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재미있게 읽었던 고전에서 추악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게 된다.


흥부 이야기가 나온 김에 흥부 부터 살펴보자. 저자는 흥부를 두고 할 수 있는 거라곤 새끼 내지르는 일뿐이라며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흥부는 일할 능력도, 재능도 없고 무엇보다 할 의지가 없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매품 파는 것뿐인데 매를 맞아 번 돈은 흥부 약값으로 다 쓰이니 한심하기 이를데가 없다. 놀부가 욕심이 많다고는 하지만 저런 동생을 보고 있자면 복장이 터질만도 하다. 흥부네는 이런 흥부의 무능함이 자식에게 까지 영향을 미친다. 자식들도 줄줄이 앉아서 밥타령만 하지 뭔가를 해보려는 의지가 없다. 가령 심봉사는 장애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고, 그래서 생활고에 시달린다. 하지만 심청이는 어느정도 크자 아버지를 봉양하고, 아버지가 되도 않게 공양미 300석을 내겠다고 구두계약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몸을 팔게 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부모의 병을 고치게 하기 위해 장기매매를 하는 식이다. 심봉사는 눈을 뜨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고 간절한 바람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눈을 떴다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글공부를 한 것도 아니니 그 나이 먹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수도 없고, 평생 일을 못했으니 아무런 경력이 없는데 무슨 일을 하겠는가? 그냥 눈을 뜨는 것 뿐이다. 그럼에도 심청이는 아버지의 일생의 소원을 들어드리고자 제 한몸을 내던진다.


이럴진데 흥부네 자식놈들은 뭘 하고 있단 말인가? 흥부네 자식들은 지금으로 치면 니트족이다. 하는 일 없이 부모집에 얹혀서 밥만 축낸다. 똑같이 없이 자랐지만 심청이는 부모를 부양하고 자기 몸까지 파는데 흥부의 아이들은 무기력하기 그지없다. 이쯤되면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고 아이들 역시 흥부를 닮은 것일 뿐이라고 아이들을 한심하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나라에 가면 이런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무기력이 무기력을 낳아 자손대대로 무기력하게 없이 지내는 것 말이다. 어쩌면 흥부네 아이들은 당장 눈앞의 먹을 것을 향해서만 아귀다툼을 하느라 미래를 생각할 겨를도 없고, 자신이 무능력하지 않다고 인지하지도 못하고, 노력하면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다는 사실도 배우지 못한 안쓰러운 아이들일 지도 모른다. 언젠가 사람은 가난할수록 멍청해진다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이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의사결정에 투여할 정신적 자원이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즉, 그 개인이 한심하고 멍청해서 가난하게 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가난에 빠지게 되면 그로 인해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가난한 흥부의 자식들로 태어난 그들을 마냥 한심하다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심봉사는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심봉사를 무능하다고 여긴다. 무능해서 자기 눈 뜨자고 자식을 팔아먹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심봉사는 아무 것도 하는 것없이 빌빌거리다가 딸의 효심 덕분에 눈을 뜨게 되는 아무 무능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심청이가 그렇게 야무진 것은 전부 심봉사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심봉사가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치명적 장애에 기인한 것이므로 그 무능을 용인해줄 수 있다고 한다. 무능하고 싶어서 무능한 것이 아니라 무능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봉사는 무능하지만 흥부처럼 무기력한 인간은 아니다. 심청이가 아버지를 보기 위해 팔도 맹인 대잔치를 벌이자 기어이 그 먼 길을 걸어간다. 그 곳에 딸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가면 눈을 뜰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잔치밥 얻어먹겠다고 그 먼길을 그냥 가는 것이다. 가는 도중 뺑덕어멈이 다른 돈 많은 부자 맹인과 눈이 맞아서(맹인과 눈이 맞을 수 있다는 전제로) 심봉사를 버리고 도망을 가자 혼자서 꾸역꾸역 간다. 가다가 옷까지 도둑 맞지만 그럼에도 무작정 황성으로 간다. 무능하긴 하지만 무기력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심봉사는 장애가 있어서 무능했는데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대했고 아무도 사람 취급을 안했다. 저자는 이것이 문제라고 한다. 장애인을 무기력하게 보는 시선보다 더 혹독한 것은 장애를 웃음거리로 보는 것, 더 나아가 '죄'나 '악'으로 보는 것이 장애인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심청전 판소리 곳곳에서 심봉사는 궁상맞은 남편, 한심한 가장으로 그려진다. 사람들은 그런 판소리를 들으며 낄낄거렸고 심봉사를 비웃었다. 뺑덕어멈에게 단물만 빨리고 버림받는 모자란 남편, 가부장답지 못한 남편, 자식을 팔아먹은 무능한 남편, 소경인 남편. 이런 '병신 담론'이 가능한 남편이었기에 심청전 이야기 속에서는 희화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각들은 현재 사람들이 장애인을 보는 시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장애인은 무엇을 해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다고 한다. 흥부는 가부장답지 못한 가부장이었지만 흥부를 남편답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는 시선은 그다지 없다. 우리가 흥부에 대해 가지는 평가는 마음씨 착한 흥부, 악독한 형 놀부에게 희생당한 불쌍한 동생이란 부분이 부각되며 미화되지만 심봉사는 자신이 젖동냥을 하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심청이를 어질고 착한 아이로 키워놓았지만 그저 앞 못보는 무능한 남편, 무능한 아버지로 평가 받는다.


우리가 많이 보아왔고 누구나 알고 있던 고전은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나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권선징악 이야기로 들어왔지만 사실 고전은 그다지 착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속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 가부장적 남성 중심사회의 사고방식들, 장애인 폄하, 효도라는 이데올로기 등 온갖 차별과 편견, 모순이 가득 숨어있었다. 고전들에 나오는 가족 이야기 속에서 이런 문제점들을 풀어보며 추악한 인간의 본성을 파헤쳐보는 너무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다른 고전들도 이런 식으로 풀어서 읽고 싶고, 우리 고전 외에도 서양의 이야기를 다룬 책도 나와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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