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머리 앤 그래픽노블
머라이어 마스든 지음, 브레나 섬러 그림, 황세림 옮김, 루시 모드 몽고메리 원작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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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엔 빨강머리 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빨강머리 앤은 TV에서 해주는 그 유명한 세계명작극장 만화영화를 가끔씩 본 것이 전부로 책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땐 성장기를 다룬 이야기에 별로 흥미가 가지 않고, 그런 이야기에 재미도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아마 저 자신이 정신적으로 너무 어리다보니 성장을 하고, 성숙해진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관심도 없었던 탓인것 같네요. 말하자면 나 자신이 성장을 하지 못한채로 살고 있는데 다른 누군가의 성장 이야기에 관심이 가지가 않았던 것이었죠. 그래서 앤의 이야기에 별로 공감도 안되고, 크게 재미를 느끼지도 못했었어요. 또 천방지축에 착하면서도 당당하게 할 말 다하는 앤의 성격이 나와는 좀 안맞는 경향이 있어서 친구가 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앞서 말했듯이 빨강머리 앤을 어릴 적 TV에서 해준 세계명작극장 애니로 처음 접했는데 개인적으로 이 애니의 그림체를 너무 싫어해서 더욱 앤에게 정이 안 갔던 것 같아요. 그 당시 방영해준 일본제작의 하이디, 플란다스의 개, 엄마찾아 삼만리 같은 류의 작화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만화들을 전부 패스하였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명작들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싫어서 보지 않았던 것일까 아쉽게 생각되네요.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빨강머리 앤은 관심 밖이었고,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크고 나서 빨간머리 앤을 다시 보게 되니 어릴 적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되고 뒤늦게 공감하고, 재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에 앤과 친했더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앤은 좋아하지만 여전히 세계명작극장 스타일의 그림에는 거부감이 있는데 이 책 [빨강 머리 앤 그래픽노블]은 완전히 다른 느낌의 앤이 등장해서 너무 좋았고, 개인적으로는 이 그림이 앤의 캐릭터에 훨씬 더 잘 어울리고, 멋지고, 예쁘게 느껴졌습니다. 앤의 얼굴은 눈동자만 덩그러니 그려놓고, 코도 대충 그린 것처럼 섬세하지 못한데 그런 대충 얼굴로도 다양한 표정을 섬세하고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고, 동작들 하나하나에도 앤의 심리가 잘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확실히 TV판 앤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예쁘고, 앤스러움이 물씬 느껴집니다. 또 초록 지붕 집과 벚나무 등의 배경과 소품들은 아주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어서 전체적인 그림의 퀄리티가 매우 높게 느껴져요. 개인적으로는 이 책 속의 앤이 앤의 오리지널 이미지로 각인되어졌습니다. 그림체도 이쁘고, 색감도 뛰어나고 정말 버릴게 없는 그래픽입니다. 그림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림을 그린 브레나 섬러라는 작가의 또 다른 작품도 보고 싶어서 찾아봤더니 그래픽노블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네요. 기억해뒀다가 다른 작품이 나오면 읽어보고 싶네요.


빨강머리 앤은 몽상가입니다. 상상력이 넘쳐서 자신의 모습은 물론 자신의 상황, 주위의 모든 것을 상상의 세계로 바꾸어버립니다. 빨강머리만은 넘치는 상상력으로도 어쩌지 못하지만요. 앤이 이렇게 상상, 공상, 몽상가가 된 것은 어쩌면 고아인 자신의 처지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자신의 불행한 상황에서 머리속으로 만든 판타지의 공간으로 현실도피를 하는 것이죠. 영화 써커펀치에서 정신병원에 갇힌 소녀들이 환상 속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과 비슷한 맥락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이건 약간은 억지이고 사실은 앤의 천성이 감성적이고 문학적 상상력이 많은 것이겠죠. 앤은 엉뚱하고 황당한 상상을 많이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이같음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보는 고정관념을 벗어난 시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라늄에게 '보니'라는 이름을 붙이고 인사를 건내자 마릴라가 핀잔을 줍니다. 그러자 앤이 '아주머니도 줄곧 여자라고만 불리는 건 싫으시잖아요?'라고 말하는데 '내 평생 살면서 저런 식으로 뭘 보고 들은 적이 없구먼'이라는 마릴라의 말처럼 나 역시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앤의 이런 생각에 감탄하고 너무 예쁜 마음이라고 느꼈네요.


앤은 문학적 감성이 아주 뛰어난 아이입니다. 제라늄에 이름을 붙이는 것 외에도 소녀적 감성이 듬뿍 들어간 말을 많이 합니다. 중2병과는 좀 다른 사춘기 소녀의 감성이라고 해야겠네요. 하지만 수다스러운 자신의 말이 점점 다른 사람들이게 차단 당하자 어느새 말수가 줄어들게 됩니다. '저기 봐! 나무 요정이 저 무지개를 건져서 스카프로 쓸까?' '나무 요정 같은 건 없어. 알잖아.' 여느날처럼 판타지의 세계에 빠져 물위에 비친 무지개를 보며 말을 하자 베프 다이애나에게 핀잔을 듣고 씁쓸한 얼굴이 되는 앤. 꼭 이 일 때문은 아니겠지만 점점 앤은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듭니다. 그것에 대해 앤은 '소중하고 예쁜 생각을 하되, 보물처럼 가슴속에 간직하면 더 좋다는 걸 배운 거죠.'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앤은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죠.


앤은 수다스럽고 공상이 많은 활기찬 소녀였습니다. 볼품없는 누런 면 혼방 원피스를 입고 기차역 앞에 어깨를 늘어트린채 앉아있던 철없던 꼬마가 별 것 없는 시골 마을의 평범한 일상을 겪으며 속이 깊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너무나 멋진 성장드라마였습니다. 책을 보는 동안 계속 미소짓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설레이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멋진 대사들과 마음을 울리는 글귀들, 그리고 너무나 마음에 드는 그림체 까지 최고의 빨강 머리 앤이었습니다. 이건 무조건 소장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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