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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거울나라의 앨리스 (패브릭 양장) - 1871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루이스 캐럴 지음, 존 테니얼 그림, 손인혜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앨리스는 어릴 적 아동문학으로 읽은 것이 전부로 제대로 된 소설을 읽는 적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좋아한다고 하는 앨리스에 대한 감상과 취향은 정확히 말하면 소설 앨리스가 아니라 1951년에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한다는 것은 디즈니의 시각화된 앨리스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이 애니는 걸작이고 정말 잘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그동안 원작소설이 아닌 만화영화로 옮겨진 콘텐츠를 오리지널리티로 생각하고 좋아했던 것이다. 아마 이런 현상을 보이는 사람이 굉장히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앨리스라고 하면 바로 그 디즈니 애니의 시각적 이미지가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디즈니표 애니메이션이 오리지널의 내용대로 만들어졌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고,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앨리스 이야기에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라는 속편이 존재하고 있었고, 디즈니 만화는 이상한 나라와 거울 나라를 섞어놓은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다녀온 후 6개월 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양이와 놀고 있던 앨리스는 문득 거실의 거울 속 세계가 궁금해졌고 거울이 안개처럼 녹아내리는 틈을 타서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는 토끼를 쫓아 토끼굴로 떨어졌고, 거울 나라에서는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거울처럼 모든 것이 반대나 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글자도 거꾸로 보이고,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려면 반대로 달려야 하고, 벌을 받은 뒤에 잘못을 저지르는 식이다. 공간적으로도 채스판위에 건설되어져 있어서 대립되는 구조를 보이고, 캐릭터들도 쌍을 이룬다. 붉은 여왕과 하얀 여왕, 쌍둥이 트위들덤과 트위들디. 사자와 유니콘, 붉은 기사와 하얀 기사가 그것이다. 거울은 사람의 심리를 비추거나 이면을 나타내는 도구라고 생각되어지는데 그래서 거울 나라는 앨리스의 또 다른 인격이나 다른 심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두 나라는 각각 수직과 수평, 공간과 시간의 상대성을 갖는다.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토끼굴에서 떨어지는 것은 수직적 변화이고, 거울 나라에서 거울로 들어가는 것은 수평적 변화를 말한다. 각 동화는 이런 차이가 계속 보여지는데 이상한 나라에선 앨리스가 커지거나 작아지는 변화를 끊임없이 겪는다. 앨리스가 거인이 되었을 때 흘린 눈물에 작아진 앨리스가 빠지며 그것을 바다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차원(공간)의 상대성이다. 반대로 거울 나라는 모두 수평(시간)적 상대성을 가진다. 앨리스가 붉은 여왕의 제안으로 체스게임에 참가하게 되어 붉은 여왕과 함께 달리는데 아무리 빨리 달려도 주변 배경이 바뀌지 않는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앨리스에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으면 적어도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한다고 붉은 여왕이 말한다. 열심히 달리더라도 주변도 달린다면 제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수평(시간)적 상대성이다.
두 동화가 다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상한 나라와 거울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는데 정체성에 관한 문제다. 이상한 나라에서 쐐기벌레를 만난 앨리스는 자기를 소개하면서 여러 번 몸의 크기가 바뀌었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며, 전에 알고 있던 것들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을 한다. 앨리스가 몸이 변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기억력을 테스트 하는 것이다. 몸의 변화가 정신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메타포이다. 거울나라에서는 각다귀와 만나 이름에 대한 논쟁을 벌인다. 그런 후 이름없는 생물들이 사는 숲으로 들어간 앨리스는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다. 거기서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아기 사슴을 만난 둘은 통성명..은 못한채 대충 친구가 되어 서로 목을 끌어안고 숲밖으로 다정하게 걸어나온다. 숲밖으로 나오자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낸 아기 사슴은 앨리스가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는 놀라 도망친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면 자신의 정체성도 잊게 된다는 것에서 나에게 이름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앨리스는 하얀 여왕의 체스말로 사용되는데 졸로 시작하여 체스판의 마침내 여왕이 된다. 그러나 붉은 여왕, 하얀 여왕과 함께 축제를 벌리지만 파티는 파토가 나고 앨리스가 붉은 여왕의 목을 쥐고 흔들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거울 나라 앨리스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인생, 꿈이 아니라면 무엇일까(Life, what is it but a dream)' 이상한 나라도 거울 나라도 모두가 한낱 꿈, 일장춘몽에 불과했던 것이다. 인생이란 꿈과 같다.
앨리스는 사회풍자적인 내용이 많은 것으로도 알려져있는데 19세기 영국의 시대상과 사회분위기를 알지 못하다보니 정확히 어떤 것들을 풍자하는지 알기는 어렵다. 일단 이상한 나라에서 모자장수가 미친 것은 당시 모자를 제조할 때 수은을 사용하다보니 모자장수들이 수은중독에 걸렸다는 것의 메타포라는 것 정도가 많이 알려진 내용이다. 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전세계의 패권을 거머쥐었던 시대였다. 하지만 산업혁명으로 공장이 급속도로 발전하자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으로 착취를 당해야 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는 12살 어린이도 공장에서 일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소설 속의 앨리스 정도의 나이인 8~9살 정도의 아이까지도 노동착취를 당했다고 한다. 하얀 여왕은 앨리스를 하녀로 채용하면서 일주일에 2펜스와 이틀에 한번씩 잼을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내일의 잼과 어제의 잼은 있어도 오늘의 잼은 없다는 규칙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오늘의 잼은 없기 때문에 언제건 오늘은 잼을 받지 못할 것이고, 결국 영원히 잼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린이를 고용하면서 말도 안되는 급여를 책정해놓고 그나마도 전부 주지 않으려 꼼수를 부리는 자본가를 비판하는 것이다.
앨리스 이야기는 루이스 캐럴이 자신이 사랑했던(!?) 앨리스에게 의식의 흐름대로 들려주었던 이야기이다. 앨리스가 방문한 나라들이 평범하지 않은 것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이 좋아하고 이해할만한 곳으로 설정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재미있는 세상이란 그런 곳이고, 아이들은 그런 이상한 사건을 좋아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동심을 가진 아이들이야말로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다는 뜻이 될수도 있겠다. 어른이 앨리스를 이해하려면 분석하고 비판하지 말고 그저 동심을 가지고 앨리스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앨리스는 이후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하야오 감독은 항상 자신의 작품으로 어른들에게 동심을 전해주려 했다. '시시한 어른이 되어버린 당신들에게도 한때는 빛나는 꿈이 있었음을 잊지 마라'라는 하야오 감독의 이 말이 앨리스의 작품 세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가장 명확하게 말해주는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온갖 풍자와 비평, 말장난, 넌센스들은 아이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는 하다. 어른들이 읽기엔 동심이 부족하고, 아이들이 읽기엔 이해가 어려운 그야말로 이상한 나라의 소설이다.
이 책 거울나라의 앨리스는 1871년 오리지널 초판본 패브릭 양장 에디션으로 표지에는 붉은 여왕과 하얀 여왕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표지 색깔도 깔끔하고, 디자인도 멋지고, 패르릭 양장답게 뽀송뽀송한 감촉도 매우 좋다. 이상한 나라만큼 유명하지 않거나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로 오해받고 있는 거울 나라의 이야기를 접해볼 좋은 기회이다. 앨리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건 무조건 소장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