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잘 살았습니다
류승희 지음 / 생각정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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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잘 살았습니다]는 평범하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특별하지도 않고, SNS속의 사람들처럼 화려하지도 않으며, TV광고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멋있지도, 고급스럽지도 않고, 항상 정력에 넘치는 생기있는 모습의 인싸도 아닌 그냥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지하철 안내방송만큼이나 건조하고 상투적인, 때론 찌질하고 비루하기도 한 너와 내가 가족이란 이름을 달고 우리의 하루를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아이와 놀아주고, 사소한 일로 상처받고, 마음을 다치고, 서글프고, 그럼에도 다시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을 그대로 담아놓았습니다. 몇몇 에피소드는 누가 나의 일상을 관찰해서 그려놓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싱크로되는 이야기도 있고, 비록 똑같지는 않아도 공감되고, 이해되고, 감정이입이 되어서 가슴이 찡해지는 것도 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그래 누구나 다 똑같이 사는구나. 다들 특별할 것 없이 다들 똑같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어..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르지 않음에 감사하고 안도하게 됩니다.


책에는 여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와 느리게 걸음으로서 비로서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누군가의 엄마로, 딸로, 아내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나의 자리는 어디인지, 하나의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아가면서 나의 자리를 잃어가는 아쉬움과 빈자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엄마를 보며 느끼는 안타까움, 미처 몰랐던 아버지란 자리의 큰 사랑의 감정, 아이들이 점점 커가며 언젠가는 아이의 자리를 놓아줘야 할 예정된 이별의 자리, 사랑해서 함께 했지만 불쑥 찾아오는 남편이란 자리의 서운함 등 이 땅의 엄마이자 딸이자 아내로 사는 여성들의 마음이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많은 에피소드들이 임신과 육아라는 세계의 일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결혼이란 축복으로 시작하여 임신을 하고, 사랑의 결실을 가슴에 안으면 감동이 밀려오지만 리얼 100% 찐 부모의 현실육아는 잡지에서 보던 파스텔톤의 뽀샤시한 사진이랑은 너무 많이 다릅니다. 육아라는 세계는 여전히 여성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지는 게 현실이라 아이가 커가는 만큼 개인 사생활과 자존감은 사라지고, 아이의 엄마라는 고유명사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자기가 좋아했던 것을 하지 못하게 되고,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고,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닌 아이가 원하는 곳을 가게 된는 삶. 나의 무엇, 나의 어떤 것.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자신의 고유명사를 떠나보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힘들고 평범하게 여겼던 일상의 많은 일들이 책을 통해 하나씩 곱씹어보니 하나같이 소중하고, 귀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늘 함께 있어서 소중하게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 하루종일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어서 귀하게 느끼지 못한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 결혼했을 때는 하나였던 치약이 두 개가 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렇게 치약이 하나 늘어난 것으로 가족이란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합니다.


여자의 삶, 워킹맘의 고충, 육아의 아픔 등을 주로 말하고는 있지만 그 외에도 남편의 입장, 엄마의 시선, 아빠의 꿈 등의 이야기도 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가족드라마인 셈입니다. 그동안 미쳐 몰랐던,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나 살기 바쁘다고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던 엄마의 사랑과 아빠의 속마음 이야기에 가슴이 짠해지기도 하고, 언제나 무심하고 밉상으로 보이던 남편의 애잔함도 느낄 수 있어서 마음 한켠이 훈훈하고도 아련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누굴 탓하거나, 잘잘못을 가리거나, 애써 변명을 해주지 않습니다. 나의 삶이란 게 원망받아서도 안되고, 나 또한 다른 가족들을 원망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처럼 그냥 있는 그대로를 덤덤하게 그려낼 뿐입니다.


가족간의 대화합을 부르는 에피소드나 공감과 치유를 위한 에피소드도 없고, 또 수고했다고 격려하거나, 칭찬하거나, 일부러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는듯한 감동의 대사를 읊어대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가슴이 따듯해지며 봄날의 오후처럼 포근하고 흐뭇함에 미소가 지어지는 마법이 펼쳐집니다. 아마도 우리의 일상이란게 그런 것이 아닐까 해요. TV시트콤처럼 매일 특별한 일도 없고, 영화처럼 극적인 일이 벌어지지도 않지만 잔잔히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어서, 그 흐름 속에서는 못느끼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멋진 풍경이 되는 그런게 인생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필로 그린 듯한 만화라서 이런 느낌을 더욱 잘 살려주는 것 같습니다. 그림이 선명하고, 경계가 분명하고, 색채가 명징하게 짜여져 있다면 한발 떨어져서 TV를 보듯 남의 이야기를 보는 기분으로 봤겠지만, 흐릿하고 부드럽고 경계가 없는 느낌이라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기분도 들고, 오늘 있었던 하루일과를 머리 속으로 떠올리는 듯한 느낌으로 책을 읽다보니 더욱 가깝고 친밀하게 느껴졌습니다.


다만 각 에피소드의 끝머리에 일본 하이쿠가 들어가 있는데 그다지 에피소드와 잘 붙지도 않고, 그 자체의 느낌도 좋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 에피소드 마지막에 붙는 멘트는 그 에피를 귀결하고, 감정을 끌어모아 강하게 때려주는 역할을 하는데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하이쿠를 써놓으니 그다지 감정전달이 되지도 않고, 에피소드에서 쌓아놓은 감정을 갈무리해주는 역할로도 부족했다고 느껴집니다. 나름 에피소드의 내용과 관련된 하이쿠처럼 보이는데 일본식 정서가 담긴 하이쿠라서 그런지 잘 안 붙네요.


전체적으로 너무 따뜻하고, 가슴이 포근해지는 일상툰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일상을 통해 나의 일상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나의 기분을 싱크로시켜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서 나의 일상이 다르지 않다는 것에 안도하고, 내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하고, 그를 통해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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