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즐기기 -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닐 포스트먼 지음, 홍윤선 옮김 / 굿인포메이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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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책과 종이 신문으로 대변되는 인쇄 시대의 미디어 진영에서 TV시대의 미디어로 넘어왔고, 한발 더 나아가 지금은 모바일과 유튜브라는 소셜미디어 네트워크와 개인방송 플랫폼으로 진화하였다. 과거에는 도서관에서 한정된 정보를 얻었지만 정보화 사회가 된 지금은 TV, 모바일, 인터넷과 같은 초고속 전자매체로 방대한 양의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정보가 주어지자 쓸모없는 정보도 전체 정보의 양에 비례하여 늘어났고, 진실은 불필요한 가짜 정보에 수몰되었으며, 정보를 취하는 사람들은 소극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라고 말했던 축구 가목 알렉스 퍼거슨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극적이거나 무가치한 저속한 문화를 향유하게 되었다. 페북 '좋아요'의 노예가 되거나, 게임에 빠지거나, 하루종일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하고, TV와 넷플릭스 앞에서 떠나지 않는다. 테크놀러지도 결국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지만 테크놀러지의 변화로 초래된 결과에 대해서는 일반적 합의도, 논의도, 반대도 없이 받아들이고 맹종하였다. 그리고 초고속 전자매체로 인해 형성된 생활방식, 관계형성, 관념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죽도록 즐기기는 과거 인쇄 시대였던 20세기에 이런 21세기의 뉴미디어시대를 예언한 비평서이자 성찰없는 미디어세대를 위한 예언자적 메시지이다.


흔히 TV를 바보상자라고 말을 한다. 시청자가 TV를 보는 것에는 비판의 선택적 수용이라는 측면이 거세되기 때문이다. TV라는 미디어는 일대다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의 특성상 송신자와 수신자의 역할이 고정되어 있어서 정보의 흐름은 일방향성을 가진다. 상호소통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시청자에게 정보가 주입되는 형태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빠른 장면전환과 내용의 변환은 시청자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무비판적이고, 무분별하게 TV에서 전하는 정보를 받아들이게 된다.


TV에서 보여지는 정보는 책과 같은 매체와는 달리 정보의 전달의 시간이 길지 못하다. TV프로그램은 매 8분마다 사건을 완결시키고 다음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그것을 전달하는 진행자는 '자 다음은..'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 말은 무엇인가를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모든 관계를 분리시키는 용도로도 쓴다고 한다. 하나의 꼭지의 뉴스나 담론을 말한 후 '자 다음은..'이라는 말로 이전의 담론과 분리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진행자가 '자 다음은..'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러면 이전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건 그 내용은 우리 머리 속에서 지워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단절을 상징하는 메타포인 셈이다. 시청자는 TV에서 보여주는 담론을 차례대로 따라가다보면 생각이나 느낌을 끌고다닐 필요가 없다.


요즘 종편에는 뉴스 버라이어티 쇼라는 기형적인 프로그램이 굉장히 많은데 여러 패널이 나와서 몇 가지의 사건 사고에 대해 토론을 하는 형식이다. 하나의 담론이 진행되다가 진행자에 의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면 시청자도 함께 다음 이야기로 갈아탄다. 진행자의 '자 다음은..'이라는 말과 함께 시청자는 더 이상 이전의 담론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내용을 재구성하며 통찰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고 방금 했던 이야기들은 모두 잊어버린다. 그리고 TV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를 따라가게 된다. 쉽게 말하면 방송이 떠먹여주는 것만 계속 먹게 되고 그것에 길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TV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에 본질은 사라지기 일쑤다. 심지어 요즘은 자막으로 시청자에게 친절하게 요약까지 해주면서 더욱 TV를 보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코메디 버라이어티에서 웃음 포인트를 짚어주며 '자 여기서 웃으시면 되고요' '이게 웃음 포인트랍니다' '지금은 감동을 주는 시간이에요'라는 식으로 사람이 감정까지 컨트롤하며 좌지우지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나, 경험했던 사실들 조차 잊고 TV에서 전해주는 정보와 감정의 변화까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TV는 말보다는 이미지가 우선하기 때문에 때로는 정보의 본질보다 이미지에 빠져 중요한 내용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작년에 있었던 대통령취임 2주년 특별기획 대담에서 그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던 기자의 태도논란이 불거지며 정작 대담의 내용은 사라지고 기자에 대한 논란만 언급되었던 일이 있었다. 또 1992년 미국 대선 때 클린턴이 TV쇼에 나와 색소폰을 부는 퍼포먼스를 벌린 이후 부시에 비해 신뢰도가 20%나 낮았던 클린턴은 단숨에 부시를 뛰어넘어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클린턴의 공약이나 정치적 어젠다보다 색소폰을 부는 젊은 이미지가 유권자에게 더 크게 다가갔던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색소폰을 부는 퍼포먼스 외의 다른 정치적 요소는 사라지고 이미지만으로 클린턴을 선택했다는 뜻도 될 것이다.


저자는 TV가 쏟아내는 허상과 소음과 경쟁과 소비의 유혹에 빠져 허덕일 것인가, 나와 가족을 위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항간에는 TV가 부모 세대의 문화이고, 지금은 인터넷 세대이므로 이 책의 논의와는 맞지 않는다는 말도 하는 것 같다. 분명 케이블TV조차 없었던 공중파 방송이 전부였던 과거에는 책에 나오는 것처럼 TV의 영향력이 더욱 크게 발휘했었지만 지금은 수많은 채널 선택권과 다양한 플랫폼을 이용하여 필요한 프로그램의 필요한 부분만 취사선택하여 보고, 광고조차 건너뛰기 할 수 있기 때문에 저자의 우려를 넘어서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TV에서 휴대폰으로 매체만 넘어갔을 뿐 현상은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휴대폰, 컴퓨터, 인터넷, TV 등을 포기하는 전자매체 단식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동안 죽도록 즐겼으니 이젠 미디어의 구속에서 벗어나자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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