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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정아은 지음 / 천년의상상 / 2020년 5월
평점 :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일이 있다. 그 중엔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3D 직종도 있고, 가치있고 보람된 일도 있으며, 무의미하고 지루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일 또한 있다. 어느 것이 더 힘든지,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따지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가치없고, 무의미한 일로 취급당하는 일을 꼽을 수는 있다. 바로 집안일, 가사노동이다. 가치없는 일이 아니라 가치없는 일로 취급당한다는 표현을 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집안 일, 가사노동을 한다는 것은 집에서 놀고 먹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집안일에는 쉽고 하찮고 가치없고 편하고 여자가 응당 해야만 하는 놀고먹는 일처럼 인식되어졌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집안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집안일처럼 힘든 일도 없다. 아무리 해도 티가 안 나지만 하루만 손을 멈추면 금세 안한 티가 난다. 해도해도 끝이 없고, 잠시도 쉴 시간이 없다. 도무지 집안일 하는 사람에게 집에서 논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번이라도 제대로 집안일을 해보고서나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진짜 문제는 가사노동이 정말로 힘이 드는가 아닌가 하는 노동 강도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노동 강도에 대한 오해보다 노동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 이 책에선 다양한 관점에서 주부라 불리는 사람들의 집안일에 대한 오해와 편견, 그 속에 숨겨진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살펴본다.
이 책은 여자들, 주부들은 왜 열심히 일을 하고도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는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찰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이 '집에서 논다'는 말이 자신의 일상을 부정당하는 말이라고 해석한다. 방금까지도 집안일에 매달려있었는데 그런 주부에게 집에서 놀고 있다는 말을 한다면 하루종일 했었던 가사노동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되고, 그 일을 했던 자신을 깎아내리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겨우 말 한마디에 과민하게 반응한다거나, 별 것도 아닌 말에 왜 화를 내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차별은 가장 먼저 언어에 스민다고 한다. 집에서 논다는 그 말은 단순히 여성의 가사노동이나 그 노동의 주체자인 여성을 왜곡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여성을 향한 차별적 시선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문제시 하는 것이다. 그 말이 단순히 육아, 요리, 빨래, 청소, 설거지 등 고된 노동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것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남성들의 오해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여성과 여성의 가사 노동에 대한 차별적이고 폄하하는 마음이 기본으로 깔려있다가 그런 차별이 말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런 차별적 인식은 비단 여자를 향한 남자들의 시선만은 아니다. 저자가 둘째를 임신하여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와 가사를 도맡아 하고 있을 때 고교동창이 전화를 하여 '너 요즘 집에서 논다며?'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같은 여자끼리도 가사일을 노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이미 사회적으로 집안일을 하는 것을 집에서 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져버린 것이다. 지독히 뿌리 깊은 차별의 인식들. 그리고 고정관념. 사회의 성적 고정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인식에 여성들 스스로도 전도되어 버린 것이다.
저자는 여성의 가사노동이 남성 근로자의 노동력 재생산에 미치는 절대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힘들게 가사노동을 하고도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는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 가사 노동은 왜 이렇게 폄하 당하게 되었고 이런 현상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애환과 고충의 감정적인 토로나 언어적인 배려와 공감의 감성보다 더 구체적인 해답이 필요하며 경제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문제의 핵심은 '돈'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뒷바침하기 위해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레슬리 베네츠의 [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게오르크 지멜의 [돈의 철학], 카트리네 마르살의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낸시 폴브레의 [보이지 않는 가슴], 실비아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 [혁명의 영점],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등의 수많은 저서를 인용한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며, 이기적 욕망에 충실하기만 하면 그 욕망의 결과물들이 모여 사회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상태를 만들어낸다는 말을 하였다. 여기엔 경제적 인간이라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는데 인간은 여러모로 잘 따져보고 자기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합리적 결정을 내린다는 가정이 그것이다. 이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 속에서 인간들은 경제적 이익 실현을 욕망하여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이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에는 경제적 이익 실현만을 따지지 않고 가족을 위해 온갖 노력으로 저녁 밥상을 차린 어머니의 존재를 빼놓았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인간인 노동자가 자기 이익에 충실해서 아무리 경제적 이익 실현을 하였어도 이익을 생각치 않고 저녁 밥상을 차린 어머니의 존재가 없었다면 그 어떤 노동자도 저녁을 먹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모든 노동자의 저녁을 차리는 어머니의 가사노동을 경제 요인에 포함시켰다면 경제학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 단언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노동자는 가치생산을 하는 존재를 말하는데 어머니는 경제적 이익 실현을 하지 않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노동을 하기 때문에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명절이 되면 종편 방송에서 수많은 여성 변호사들이 나와서 여성들의 가사 노동을 비용으로 따져서 얼마정도 만큼의 값어치를 한다고 강변하는데 정말로 가사노동이 그 정도의 경제적 비용으로 치환되는지는 모르겠고, 또 그런 주장으로인해 여성의 노동가치가 그만큼의 인건비에 해당하는 노동으로 인정받게 될것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적어도 경제학에서 생략되었던 어머니의 손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시도는 계속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