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 최신 버전으로 새롭게 편집한 명작의 백미, 책 읽어드립니다
조지 오웰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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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은 어릴 적 만화영화를 본것과 아동용 소설을 본것이 전부로 원작을 읽은 적은 없다. 풍자와 사회비판의 끝판왕이라고 알려졌지만 어릴 때 읽었던 아동용 문학책과 만화 영화로는 풍자적인 요소를 읽어내는 것은 힘들었다. 사회 비판이라는 것을 알기도 어려운 나이었고, 그저 돼지와 온갖 동물이 나오는 재미있는 소동극으로만 봤지 거기에 사회주의나 전체주의의 함의와 은유를 읽어낼리 만무했다.


동물농장은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를 대놓고 비판하는 내용으로 알려져있다. 소설의 무대인 동물농장은 사회주의 사회인 소련이고, 돼지들은 스탈린이나 마르크스의 상징이며, 농장주 존스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렇기에 러시아혁명이나 소련의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이 소설의 정확한 의미를 알겠지만 소련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은유와 풍자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회주의의 기치아래 만들어진 소련은 몰락했고, 사회주의 체제는 실패한 이념이 되었다. 이념과 체제가 바뀌었으며, 사회는 빠르게 변했고, 더 이상 냉전시대도 아니다. 이렇게 많은 것이 변한 21세기에 과거 사회주의 사회를 비판한 동물농장을 읽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 때의 체제와 가치관을 풍자한 내용이 지금 사회에서도 똑같이 풍자의 의미로서 읽혀질 수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사회주의 체제는 붕괴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가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꼬집던 똑같은 문제를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복하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 적어도 한국의 근현대사에서는 동물농장과 같은 사회문제를 읽어낼 수 있다. 동물농장은 사회주의 비판이기도 하지만 전체주의 사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해방 이후 전체주의적 사회였던 대한민국에서도 그와 같은 메타포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감안하여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따라가며 동물농장을 읽어보자.


늙은 돼지 메이저는 인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동물을 착취하여 배를 불리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몰아내면 동물들만의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중노래로 인간에 대한 적개심을 고양시키고, 동물들끼리 단결하게 만든다. 여기서 메이저의 연설을 눈여겨 볼만한데,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당선언의 마지막 구절 '프롤레타리어여 연대하라'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다 메이저가 죽자, 그 유지를 이어받은 세 마리 돼지-지혜로운 스노볼, 권력욕에 불타는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똘마니 스퀼러가 나타나 동물들을 이끈다. 어느날 농장주가 술에 취해 먹이 주는 것을 잊자 동물들이 굶주림에 분노하여 봉기하여 농장주를 내쫓는다. 혁명을 성공한 동물들은 농장 이름을 동물농장으로 바꾸고, 7계명을 만들어 공표한다. 배고픔은 민중을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모든 농민 봉기의 원인은 배고픔이었다.


혁명에 성공한 동물들은 스노볼과 나폴레옹을 지도자로 하여 각자 자신의 능력대로 노동을 하고, 식량을 배급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다 돼지들은 점점 노동에서 열외하여 다른 동물들을 지시하며 편하게 살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쫓겨난 농장주는 사람들을 모아 농장을 찾기 위해 처들어오지만 동물들은 사람들을 무찌르고 농장을 지켜낸다. 동물들은 이를 '외양간 전투'라고 부르며 승리를 축하한다. 그러나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서로를 견제하고 대립하기 시작한다. 이상주의자였던 스노볼은 동물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자급자족을 위해 풍차를 지을 것을 입안하지만 나폴레옹이 그것을 반대하고 몰래 개들을 풀어 스노볼을 숙청하는데 이는 이승만이 서북청년단을 이용해 김구를 숙청한 것과 유사하다. 권력욕을 가진 음흉한 나폴레옹이 현명한 지도자였던 스노볼을 추방시키듯, 권력욕에 빠진 이승만이 김구선생을 암살한 것이다. 그리고 스퀼러는 나폴레옹을 옹호하고 스노볼을 음해했고, 동물들은 그 말을 믿고서 스노볼이 나쁜 돼지였다고 믿게 된다. 박정희가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을 죽이기 위해 빨갱이라고 정치공작을 하고 그 말을 아직까지 굳게 믿고 있는 것과 같다.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풍차 계획이 원래 자기 아이디어였다며 동물을 속이고 풍차 만드는 국책사업을 시작한다. 풍차건설은 박정희의 고속도로 건설을 떠올리게 한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경기를 부양하고, 국민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고속도로 건설이라는 국책사업을 했고, 이명박도 4대강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국책사업을 했었다. 풍차를 짓고 식량생산을 위한 노동을 하며 동물들의 노동 강도는 점점 심해져만 가지만 동물들은 그것에 길들여져 갔다. 마치 박정희가 자신의 정치자금, 돈줄을 대주던 쌍용 김성곤이의 요청에 남아도는 시멘트 악성재고를 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각 마을마다 시멘트만 내려보내고 노동력을 동원해 국책사업을 벌린 새마을 운동이 농촌을 살렸다는 식으로 생각하며 어처구니 없게도 개인의 재산과 노동력 착취를 미화하고 찬양하거나, 환경파괴의 주범인 4대강이 홍수를 방지하고, 농업용수에 유용하게 사용된다고 굳게 믿으며 4대강 사업을 미화하고 지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돼지는 금지사항이었던 인간과의 거래를 시작하였고, 역시 금지사항이었던 인간의 집에 들어가 인간의 침대에 누워자고, 옷도 입고, 술도 마신다. 그럴 때마다 모든 동물을 위한 7계명은 돼지를 위한 7계명으로 멋대로 바뀌었고, 그것은 돼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내용으로 고쳐졌다. 이승만은 불법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했었고,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통해 영구집권을 꿈꾸었다. 전두환도 헌법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을 노렸다. 돼지들이 7계명을 바꾸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독재자들은 멋대로 헌법을 바꾸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습성을 가진다.


그러던 어느날, 풍차 건설 중 바람에 의해 풍차가 무너지자 나폴레옹은 이를 스노볼의 소행으로 몰아가며 동물들의 분노를 외부로 돌린다. 한국의 보수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면 빨갱이 타령, 레드 컴플렉스를 건드리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농장의 식량 생산이 감소하여 동물들이 굶주리자 나폴레옹은 스노볼 탓을 하며 공포정치를 한다.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권력을 견고히하기 위해 외부의 적인 북한을 이용하며 반공이라는 공포정치를 했었다. 이명박 시절 사자방으로 대변되는 말도 안되는 사기행각으로 나라살림이 거덜나자 모든걸 전임 대통령인 노무현 탓을 하였다. 정권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모두 고소 고발을 하고 국정원을 동원해 민간인 사찰을 하고, 집회에 나온 사람을 향해 물대포를 쏘는 등 공포정치를 하였다.


나폴레옹은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계명에도 불구하고 개들을 이용해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불만을 품은 세력들은 첩자로 몰아 죽여버린다.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을 동원해 수많은 제주 시민을 죽였다. 박정희는 중정을 동원해 수많은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으며, 전두환은 광주의 시민에게 총을 쏘았고, 백골단을 동원해 시위하는 우리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했다. 이 독재의 시절은 동물농장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오랜시간 동물들이 불러온 '영국의 동물들' 노래도 금지시키는데 이명박 박근혜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금지시킨 것과 같다.


돼지는 점점 동물들에게 더 심하게 노동을 시키고 배급은 줄이는데 말 복서는 묵묵히 돼지의 압제에 반발하지 않고 남들보다 더 많이, 열심히 일을 한다. 복서는 다른 동물을 위해 헌신하지만 오히려 복서의 그런 행동 때문에 다른 동물들은 돼지의 독재에 침묵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열심히 일하는 복서가 독재에 수긍하고, 불평 불만 없이 앞장서서 일을 해버리니 다른 동물들은 어쩔 수 없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권력가의 불법적인 행동에도 입을 다물고, 아둔하게도 독재자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대다수의 민중의 모습이지만 이런 자기 희생이 과연 동물농장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볼 문제다. 김대중은 옳지 않은 일엔 벽을 보고라도 욕을 하라고 했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 행동하지 않는 자는 악의 편이라 했다. 당나귀 벤자민은 혁명에 가담하지도 혁명에 반대하지도 않는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당나귀이다. 그는 '매사 불변한다'는 신념과 냉소주의, 무관심한 경향을 가진 지식인의 메타포이다. 침묵보다 이런 무관심이 더 나쁘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라고 말했고, 노무현은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를 돌리지 마라. 낡은 정치를 새로운 정치로 바꾸는 힘은 국민에게 있다고 강변했다. 자기희생으로 열심히 일을 했던 복서도, 무관심했던 벤자민도 모두 동물 농장을 망치고 있던 인물이었다. 복서가 중상을 입자 나폴레옹은 병원으로 보낸다고 하고서 도축장으로 팔아넘긴다. 우매한 민중의 결말은 이렇다.


시간이 오래 지난 후 돼지들은 두발로 걷고, 사람처럼 행동하고, 다른 동물들 위에 군림한다. 돼지는 주위 농장의 인간을 초대하여 파티를 여는데 밖에서 동물들이 안을 들여다보니 어떤게 사람이고 어떤게 돼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동물을 위해 혁명을 했다던 세력은 권력을 가지게 되자 자신들이 혁명으로 축출한 권력자와 똑같이 변해버렸다. 결국 모든 동물을 위한 혁명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한 쿠테타였던 것이다. 박정희의 5.16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민중을 위한 혁명은 민중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특정 세력에 의한 쿠테타는 결국 그 세력이 권력화되는 수단에 불과하다. 진정한 민주사회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촛불혁명과 같은 시민에 의해 주도되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은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 동물농장의 동물들처럼 인격과 자유의 탄압에 침묵하고, 독재에 항거하지 않는다면 권력층은 부패하고, 민중은 스스로 억압당하는 것을 허락하는 셈이다. 권력층의 부패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은 깨어있는 시민의 집단지성 뿐이다. 멍청하게 독재자, 권력자의 빨갱이 타령이나 슬로건에 세뇌당하고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소련의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의 직접적인 풍자극이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반공국치로 대변되는 한국식 전체주의에 대한 의미로도 읽어낼 수가 있어서 우리에겐 더욱 와닿지 않을까 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한국의 독재권력과 민중억압, 쿠테타 그리고 시민혁명 등을 대입하며 읽는다면 조지오웰이 말하려고 했던 원래 의미와는 또 다른 한국식 동물농장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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