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누구나 철학자가 되는 밤 - 인생은 왜 동화처럼 될 수 없을까? 문득 든 기묘하고 우아한 어떤 생각들
김한승 지음, 김지현 그림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4월
평점 :

누구에게나 잠못드는 밤이 있다. 외로움에 가슴이 아리는 밤, 세상에서 철저히 외톨이가 된 밤, 사랑에 아파 눈물짓는 밤, 사무치는 그리움에 잠들지 못하는 밤, 일상에 지쳐 무너지는 밤. 그런 밤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밤이면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철학자처럼 생각이 깊어지고 자신만의 생각의 궁전으로 들어가 사색의 시간에 잠긴다. 일상에 작은 틈을 내는 기묘하고 우아한 생각들은 내일을 살아가는 힘을 주기도 한다.
이 책은 철학자인 아빠와 삽화가인 딸의 대화이다. 철학자의 머리 속은 잘 정리된 철학의 공간과 정리되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채 제멋대로 자란 상상이 뒤엉킨 정글이 공존하고 있다. 아빠는 딸과 이야기를 하면서 정글 속을 헤쳐나갔고, 막혔던 시야가 트이며 무지개를 보기도 하고, 하늘위 달을 보기도 했다. 정글에 밤이 찾아오면 온갖 상상으로 가득찬 정글은 낯설면서도 아늑한 공간이 된다. 정리되지 않은 철학의 공간에서의 철학은 그런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누구나 밤이 깊은 정글에 오면 철학자가 된다고 한다.
논리와 철학적 사고의 경계 밖에 있는 뒤엉켜있는 상상과 잡다한 생각들을 건져올려 철학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하여 나열한 것이 이 책이다. 그래서 책의 철학적 주제들은 정.말.로. 철학자들이 진리를 추구하고, 존재와 인간의 본질을 찾는 그런 커다란 의미가 담긴 내용이 아니라 사소하고, 잡다하며, 뒤죽박죽 뒤섞인 기묘하고, 엉뚱한 상상에서 출발하고 그런 비논리적인 생각에서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결말을 찾아낸다. 마치 정글 속에서 길을 찾아내듯이 말이다.
원숭이는 소망한다,
소망을 소망하기를
원숭이들은 각자가 원하는 분야의 전문가가 되길 소망했고, 그래서 전문가 양성 학교에 들어가길 소망했다. 전문가 양성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입학시험에 합격하길 소망했고,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싶어하는 원숭이가 많아지자, 그들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전문가 양성 학교를 졸업한 원숭이는 합격을 도와주는 전문가 양성 교육 전문가가 된다. 전문가 양성 학교가 있지만 전문가는 없는 상태. 이건 지금 우리 사회와 비슷해보인다. 사람들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길 소망해서, 좋은 학교에 입학하려 하고, 좋은 학교에 입학하길 소망해서 좋은 학원에 간다. 학교에 가서 원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한 스펙으로서 좋은 학교에 가길 소망하는 것이다. 큰 욕망을 위해 작은 욕망을 쌓아가는 것. 라깡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했다. 원숭이들이 서로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움직이듯 움직인다. 그들은 서로의 욕망을 욕망하고, 소망을 소망한다.
모든 사람들이 갖는 욕망이
꼭 나의 욕망일 필요는 없다
전문가 양성 학교를 졸업한 원숭이가 다른 원숭이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았다면 전문가 양성 교육 전문가가 아니라 자기가 처음에 욕망했던 전문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타인의 욕망으로 인해 자신이 욕망이 사라지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갖는 욕망이 꼭 나의 욕망일 필요는 없다. 난 나의 욕망을 욕망하면 된다.
체 게바라 사과와
히틀러 파인애플
여기서는 과일의 껍질 두께를 정치 성향으로 치환한 식물정치학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혹시나 정말로 그런 것이 있는지 찾아봤는데 역시 상상의 이야기였다. 얘기는 이렇다. 좌파 과일들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냥 먹혀버리는 전략을 선택한다. 우파 과일들은 자기 바어를 열심히 해서 더 많은 개체가 살아남는 전략을 취한다. 이 열매관에 따르면 딸기는 극좌이고, 블랙베리와 라즈베리도
극우 좌파에 속한다. 포도는 중도 좌파이고, 반대의 극우에는 두리안과 파인애플, 수박이 위치한다. 그리고 코코넛은 우파의 왕이라고 부른다. 바나나는 중도의 입장이다. 어떤 육종학 교수는 좌파 계열 식물에 단단한 껍데기를 입히거나 우파 계열의 식물에서 껍질을 없애는 등 좌파와 우파의 경게를 허무는 과일을 만들어 내었고, 이를 통해 자파와 우파한 인간이 만들어낸 기준에 불과했고, 그 기준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든 이분법은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과일은 껍질 두께만 다른게 아니라 색깔도 다양하고, 맛도 다양하다. 그중 껍질 두께로만 줄을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낸 기준일 뿐이고, 그것으로 과일의 정치적 성향을 측정할 수는 없다. 모든 이분법은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회색지대도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다. 결국 좌파 우파 중도 모든건 필요에 의해 구분되고 만들어 지는 것이지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트 자본주의
단식없이 다이어트를 시켜주는 농장은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만큼의 음식만 준다. 많이 먹고 운동으로 먹은만큼의 칼로리를 소모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말하며, 필요 이상으로 먹지 않으면 굳이 운동을 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꼭 일을 할 정도의 칼로리만 먹으면 더 이상 체중은 늘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다음날 할 일의 계획을 짜서 그 일에 필요한 칼로리 만큼만 먹을 수 있고 운동은 허용되지 않는다. 운동을 하지 않고, 먹으면서 살을 뺀다는 합리적인 미친소리다. 그렇게 하면 살은 빠지지만 먹는 즐거움이라는 욕구를 버릴수는 없었기에 치킨이며 맥주 등의 음식을 먹기 위해 그만큼의 많은 일을 해야 했고, 고강도의 일을 하기 위해 농장의 일을 해야만 했다. 농장은 무료로 노동력을 제공받아 돈을 벌었고, 그는 농장일을 해주고 치맥을 얻을 수 있었다.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살을 빼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에 빠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고, 일을 한만큼 보수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회사는 자연스럽게 돌아가고, 개인의 노력으로 회사는 운영된다. 내가 회사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이, 일을 하기 위해서인지, 돈을 벌기 위해서인지, 그곳을 운영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주객이 전도되고, 의미와 목적을 잃게 되는 일이 많다. 원래의 의미와 목적을 잃고 무엇을 위해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잊어버리면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굉장히 독특한 철학책이다. 기발하거나, 엉뚱하거나, 황당한 이야기를 상상하고 거기에서 현실반영의 철학적 이야기를 끌어낸다. 그렇다고 정확하게 현실적인 메타포로서의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자기가 말하고 싶은 철학적 결론을 정해놓고 그런 결론을 도출하도록 이야기를 끼워맞춰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그 상상 자체도 굉장히 재미있고, 은근슬쩍 엿보이는 소소한 철학적 이야기와 결론도 잘 어울린다.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넘치는 신개념 철학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