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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이 식사할 시간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7년 7월
평점 :
나는 여기에 수록된 단편들을 분리해서 읽고 싶지도 않고 인간의 본성이나 잔혹성을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것은 이제 쓰는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 진부한 주제가 되었다. 이렇게 내가 주장하면 누군가는 꼭 이런식으로 말하고 싶어한다. "바로 그 진부함에서 새로움을 발견해야 합니다." "진부하다고 사실을 도외시하면 안 돼." 그러나 이런 말에 일말의 타당성이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이 소설을 전부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애당초 소설의 목적이 그런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아홉 편의 단편이 보다 분명한 실로 꿰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미 소갯말에서도 나오는 '균열'이라는 것과 그리고 '습관' 이라는 키워드가 동원되어야 하는데 그 두 키워드를 가지고 보다 상상력을 가미해 이 소설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균열된 삶은 치유될 수 있을까?" 보다 더 추상적이지만 보편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균열된 삶은 원래의 삶으로 환원가능한가?"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너무나 쉽게 사람들은 하나를 버리면서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고, 삶의 어두운 측면이 있으면 밝은 측면을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이미 놓쳐버리고 이미 파괴된 내 인생의 어느 부분이 되돌아 올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는 침묵한다. 나는 <개들이 식사할 시간> 속에 들어 있는 많은 작품들이 바로 제발트의 소설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또한 '식사'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그 평범하고 습관으로 굳어져버린 것에 대해 생각한다. 강지영 작가는 모든 단편에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드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우울함이 가미된 기괴한 인물들을 하나가 아니라 연거푸 등장시킨다. 계속해서 그런 인물들을 마주하게 되는 독자는 그런 인물들에 '면역'이 되어가는데 소설의 눈이 뜨이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다. 우리는 그런 모든 기괴한 사건들에 면역이 된다. 그것은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렇고 현실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이 소설을 읽으며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온갖 감정을 투여할 때 소설은 단지 '우리 각자의 모습'을 거울삼아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진다.
이쯤 오면 소설과 현실에 대한 구분이 희미해진다. 그래서 저 아래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실'에 분노하기도 하고 온갖 감정을 집어 넣어 내면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바라보는 것은 이 소설이 그냥 거기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각각의, 단편에 결말을 이야기하지만 그 결말은 글을 맺기 위한 하나의 구성일 뿐이다. 사실 이 소설은 결말을 그대로 열어둔다. 마치 치유될 수 없는 상처는 가타부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줄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아니면 책을 덮고 나의 모습을 바라보라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