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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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 비평가들이 위대한 시인 호머는 상투적인 어구를 사용한 작가라고 말한다. 오디세우스의 형용어구는 신과 같은 오디세우스, 많은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받는 오디세우스, 참을성 있는 뛰어난 오디세우스 등인데, 6보격 시행의 나머지 부분에 딱 들어맞는 길이의 형용어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형용어구를 선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시적 운율을 맞추기 위한 장치라는 식이다. 그런데 이 상투적인 문장에 대한 효과는 단순한 게 아니다. 호머는 낭송하기 편하게 쓰기 위해서 이런 상투어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는 선과 악의 대결 구도를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독자에게 주입시켜 가는 것이다. 이 인물과 사상적, 육체적 대결을 할 인물과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점증적으로, 반복적으로 강화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호머는 선/악을 대결구도를 만들기 위한 장치이지 절대적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호머는 최초의 다성적인 울림을 가진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가장 잘 생기고 가장 발이 빠른 아킬레우스가 전리품이자 자신이 아끼는 불이 예쁜 브리세이스(크뤼세이스?)를 아가멤논에게 강제적으로 빼앗기자 ‘그대 주정뱅이여, 개 눈에다 사슴의 심장을 가진 자여.’라고 고함을 지르는데, 호머는 결코 아가멤논의 악행을 악으로 보지 않는다. 그건 욕망의 구도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이스 문학에서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인물이 영웅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신을 숭상하는 인간을 그리는 것은 문학을 만들어가기 위한 암묵적인 협약이었다.

 그럼에도 호머는 신와 신과의 대결, 신과 인간과의 대결(수용, 타협, 저항), 인간과 인간과의 대결을 적극적으로 서사에 도입시켰다. 호머가 무신론자인지 아닌지 우리는 작품을 보고 판단할 수 없다. 작품 속에서는 호머의 직업도, 가치관도 배재되어 있다. 지금까지도 호머가 음유시인이었는지, 정치인이었는지, 맹인인지, 몇 세기에 존재한 인물인지, 아니면 과연 존재하기나 한 실제 인물인지, 호머 자체가 신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글 속에 자신의 모습을 담지 않았다. 이는 막연히 장갑공의 아들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세익스피어의 경우와 같다. 세익스피어는 가끔씩 작품 속에서 장갑에 대한 묘사를 하면서 은근슬쩍 21세기 독자들에게 역사속의 인물이 사실이었음을 고백하는데 호머는 그런 모습조차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머는 그리이스 신들과 인간, 신과 신과의 관계는 아주 비중있게 처리해 놓고 있다. 이 작품은 영웅 아킬레우스를 형상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이 필요했다. 전투에서 공포심을 느끼는 영웅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하지 않은 듯하다. 실제로 신이 등장하는 장면은 전투의 국면을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또한 신들은 모든 전투의 승패를 예언하며, 인간 못지 않은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테티스

 이 작품에서 가장 인간미가 느껴지는 신은 역시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여신 테티스이다. <일리아스>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들이 트로이에서 뼈를 묻으리라는 사실을 알고는 전투에 불참시키기 위해서 여장을 시켜 여자들 무리에다 섞어 놓는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아킬레우스를 여자들 틈에서 가려내서 전투에 참가시키려고 유혹했던 자가 바로 꾀돌이 오디세우스다(그는 아주 치사한 인간이었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에 참가하면 20년 동안 고국에 발을 딛을 수 없다는 신탁을 받고 온갖 용을 쓰면서, 심지어 미친 척 하면서 참전을 피해다니다가 마지못해 끌려온 주제에, 함께 초를 쳐 보자고 아킬레우스를 꼬신 것이다. 물론 그는 아킬레우스가 없으면 트로이 전쟁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한 행동이었다. 다만 이상주의자 아킬레우스와 현실주의자 오딧세우스라는 두 인물의 정신 세계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기에 하는 말이다. 정말 <<오디세이아>>와 <<일리아스>>가 동일한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다른 세계관을 보이고 있다.)

 테티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들이 참전하면 죽으리라는 것을, 헥토르를 죽이게 되면 자신의 사랑하는,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아킬레우스의 죽음이 빨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킬레우스가 "엄마, 나 갑옷 만들어줘요!"라고 말하자 애통한 눈물부터 흘리는, 모성애를 발휘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영화 <트로이>에서 신이 등장한 것은 테티스가 유일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듯하다. 감독의 (유일한) 현명한 판단이었다)

 

 헥토르

 헥토르는 아킬레우스보다 어떤 부분에서 더욱 인간미 있게 묘사된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자식, 그리고 조국 트로이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프리아모스의 모든 아들 중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고, 전쟁의 원흉인 헬레네를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결코 아킬레우스에게 이길 수 없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성안으로 들어와서 피하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신마가 끄는 아킬레우스의 전차를 향해 창을 집어던진다.

 왜 호머는 헥토르를 이렇게 멋진 인물로 그려낸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진짜 영웅이 하급 무사와 싸워서 트로이 성을 함락시켰다는 혐의를 받으면 불쾌감을 참을 수 없었다. 사자와 격돌시키기 위해서 사슴을 그려서는 안 되었다. 그와 쌍벽을 가진, 하지만 2% 부족한 인물을 그려내기 위해서 헥토르를 묘사한 것이다. 헥토르의 인간미는 호머의 기준에서는 영웅의 모습으로는 부정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킬레우스를 더욱더 강한 인간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전쟁의 시작

  헬레네는 어떤 존재였을까? 헬레네는 여성이었다. 여성은 당시 전리품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단지 이것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님이었던 파리스가 멜레네우스의 물건을 가지고 튄 이유로 지금의 터어키 지역에서 일어난 트로이 전쟁은 시작되었다고 신화는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심심하면 쥐새끼처럼 해안선을 넘어 들어와서 농작물을 훔쳐가고, 배째 등따 라고 말했던 왜구들의 행동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아직 농경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에, 타국이 애써 일군 농작물과 가축을 빼앗는 행위가 더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언어를 가르쳐 주고, 옷 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유교를 가르쳐 준 일본에 대한 분노는 더 컸다.(앗, 이게 아닌데..갈 데까지 가보자) 이놈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들, 나 이킬레우스는 거북선으로 내 너희들이 건너온 바다를 피로 물들이리라.



 아킬레우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이야기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불패의 명장이었다. 누구보다 강했기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수그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원한 전쟁이 아니었기에, 그는 전쟁 자체를 혐오하기도 했다. 하여 프리아모스의 아들을 잡는 족족 죽이지 않고, 전투와 거리가 먼 타국으로 팔아버린다. 그의 강함은 "발이 빠른"이라는 형용사구로 묘사된다. 무사의 필수적인 단련은 상체가 아니라 하반이다. 그래서 호머는 아킬레우스가 누구보다 발이 빠른 준족임을 표현한다. 그는 총대장 아가멤논에게 입바른 소릴 하다가 전리품 브뤼세이스를 빼앗긴다.

 거만한 아킬레우스는 분노에 가득차서 총대장 아가멤논에게 나 전쟁 안해! 라고 말하며 자신이 탄 배의 곁에서 수금을 연주하면서 마음을 달랜다. 그건 거만함이 아니다. 출생신분부터 둘은 달랐다. 신의 아들이 어찌 인간의 아들에게 이런 모욕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 자신은 죽음을 불사하고 바다를 건너온 것인데, 자신의 소유를 함부로 빼앗는단 말인가.

 (등장하는 인물들의 품격을 호머는 출생신분으로 나타낸다. 거기에는 헤라클레스의 아들도 있었는데, 정말 어이없이 맞아죽는다. 왜냐하면 헤라클레스의 아들은 제우스의 손자에 불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와 아이네이아스는 그보다 한 계단 높은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헤라클레스 손자와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아마 이것은 장수들의 기량, 신분의 차이를 손쉽게 처리하기 위해 호머가 선택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그는 트로이군이 자신의 진지 근처까지 쳐들어오거나 말거나 방콕에 처박혀서 분노를 씹고 있다. 그 기간은 호머가 서사를 시작한 지 정확하게 3/4 지점까지 그는 결코 행동의 변화는커녕 심리의 변화조차도 나타나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고 권태 속으로 빠져든다.  아가멤톤은 갑작스럽게 강해진 트로이군에게 처참하게 두들겨맞고 수많은 전리품으로 보상하려 들지만 아킬레우스는 콧방귀를 낀다.

 일리아스의 많은 부분은 전투로 치장되어 있다. 상투적인 문구로 치장된 전투 사이사이에 인물의 가문과 과거의 행적이 나열된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전투장면들이 인간의 삶과 거리감이 있는 것에 기인한다. 그런데 이 장면들을 빼면 이야기는 진행될 수 없다. 전투의 양상이 달라져야지 아킬레우스가 몸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여태껏 꾹 참아왔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시종이자 친구가 죽자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그는 이때부터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오직 친구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집념을 불태운다.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다. 호머는 인간 헥토르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을 아킬레우스에게 박아넣는다. 아킬레우스에게는 겸손도 미덕이 아니요. 관용이나 친절성, 충성심, 부부애 같은 것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에게는 신의와 우정, 그리고 복수만이 자리하고 있다. 세속적인 모든 것에 열망하지 않으며, 헥토르를 죽일수록 자신의 죽음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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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림원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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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태는 수동의 형태를 가진다. 이상하게도 자발적이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권태 또한 실세계에서는 존재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기이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권태는 절대로 불행의 요인만은 아니며 어떤 부분 가진 자들만이 소유하는 행복의 하나의 형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권태가 소설 전부를 지탱할 수 있는 대주제는 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사실 모라비아도 제목만 권태라고 붙인 것이지, 전반적인 관념이 권태로 뒤덮인 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인간은 권태, 슬픔, 애상감을 스스로 견디어 내는 방법을 터득해 가고 있으니, 이런 일들은 더이상 사건화할 문제는 아닐 것 같다. 아니, 적어도 소설화하기는 힘든 테마다.

 어쩌면 앞으로의 소설은 정신분석의 영역을 넘어서버리는 소설만이 존재가치가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기존의 이론으로 분석불가능한 소설이 등장하면 정신분석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낼 것이다.

 거짓말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주 거짓말을 한다. 아니, 사랑하는 연인들은 자주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한다. 나쁜 것은 거짓말을 하는 행위나, 거짓말 자체가 아니다. 일정 수준의 진실이 담겨 있는 거짓말을 할 때 인간은 좌절하는지도 모르겠다. 실세계에서 대화는 더이상 소통의 의미로 다가서지 못한다. 소설가가 고민하는 것은 그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는 방식이고, 불가능한 현실에서 인물의 내면을 끄집어내는 일이다. 이런 고민은 점점 가속화되어가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일상의 차이에 비해 20세기와 21세기의 차이는 더욱 커 보인다.

 지금 우리 시대는 (아직도, 라고 말해도 좋다면) 철기시대다. 하지만 디지털 혁명의 시대라고 해도 말하는 것이 더 의미는 가까워 보인다.  90년대 이후 확실히 한국인은 어느 나라보다 과학기술에 의존한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거기 반해서, 드라마나 영화, 소설은 예전 문학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인)문학의 위기이기도 하며, 기회이기도 하다. 양적, 숫적으로 늘어난 인간관계에 비해 질적으로는 한없이 축소되어가는 한국인/세계인의 일상사, 사회, 문화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지 참으로 기대가 된다. 항상 문학은 사회가 한동안 변화한 후에 그림이 그려진다. 사건을 예언한 작가는 있지만, 동시대 문화를 동일한 시기에 형상화한 작가는 없는 것이다. 아무도, 누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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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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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와 프루스트는 예술과 문학에는 발전도 진보도 없다고 하지만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20세기 이후 문학은 '감정의 오류'에 빠져들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그리스문학부터 지금까지 이어져가고 있는 문학상의 차이는 형식의 변화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파토스에 대한 시각의 변화라고 볼 수도 있고, 미학과 윤리학의 기준이 조금씩 변해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문학이란, 철학과 미학, 윤리학이 삼각형의 세 점의 꼭지점으로 지탱되어야 작품으로서 존재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미학을 제거하고 문학을 바라본다든가, 혹은 윤리학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텍스트는 만들어질 수도 없고, 분석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그리스 이후 문학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읽었을 때, 나는 당혹감이 내재된 폭소를 터트린 장면이 있다. 그들은 잔혹함에 대한 연민 같은 부분은 의도적으로 텍스트에 구현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이 감정에 연루되어 있다는 말은 어떤 부분 옳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오늘날 문학작품보다 더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소설은 점점 윤리적인 감각이 모호한 상태가 되어간다. 무감각함과 모호함은 다르다. 이제는 독자가 작품 속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출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19세기 소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현대소설의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가와 독자들이 동의하는 작품은 윤리, 이데올로기, 종교와 무관한 작품은 없다. 프라이 말대로 문학과 예술은 변하는 듯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다.  
   마르케스는 카니발성을 가진 작가인 반면, 칼비노는 카니발성과 반소설적인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반소설이란 영미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들의 안티 로망을 지칭하는 것이며 누보로망과는 무관하다. 반소설과 카니발은 비슷한 속성을 가진다. 카니발은 관념과 이미지의 순간적인 위치이동이라고 한다면,  반소설은 한번 텍스트 속에서 구현되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관념의 왜곡화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카니발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가 되지만, 반소설은 고정화되어 있는 가치관의 조롱으로 드러난다. 칼비노는 생각보다 복잡한 작가인 듯하다.
  그는 스포이드의 물을 떨어뜨려 리트머스 시험지에서 서서히 번저나가는 감동, 그 감동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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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 칼비노 선집 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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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보르헤스의 등장 이후, 수많은 보르헤시안이 좀비처럼 늘어났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개인적으로 평가한다면 재주는 보르헤스가 넘고 나보코프, 귄터 그라스, 칼비노, 아베 코보가 모자에다 돈을 걷었으며, 마르케스와 루시디, 쿤데라가 은행에다 저축한 자금을 하루끼가 부동산에 투자한 것 같다.

  칼비노의 이 작품은, 문학적 관행 하나를 부정하고 들어간다. 그것은 소설은 발자크처럼 서술도 아니고, 플로베르처럼 묘사도 아니며,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실존을 탐색할 필요도 없다는 것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이전 작가들처럼 네 개의 기둥을 박고 건축물의 기본적인 토대를 만들고 난 뒤 소설을 출발하지도 않는다. 그는 동시적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분명 그는 오늘날 작가들이 진행해 나갔던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한 관심은 두지 않는다. 상황의 실존에서 언어의 실존성으로 나아가는 신 실존주의자들도 아니고, 우연, 환상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도입하며, 철학을 드러내는 방식이 반드시 관념을 순진하게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라고 텍스트 상에서 구현한 작가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미술은 20세기에 들어서  구상에서 추상으로 나아갔다. 카프카나 아베 코보, 그리고 칼비노는 그런 미술품을 대하듯 읽는 것이 하나의 독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왜 마스케스 팬들이 칼비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지도 조금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지금 내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칼비노가 도덕을 드러내는 시각이다. 그는 딱히 단정지을 수 없는, 비결정적인 시각으로 소설을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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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상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 예가출판사 / 199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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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비아는 리얼리즘, 심리주의, 실존주의의 경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작가다. 처음 이 작가의 작품을 읽었을 때,  사실 실존주의를 말할 때 흔히 까뮈를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토스토예프스키나 쉴러가 이들보다 먼저 실존의 영역을 개척했다고 보아야 한다
 소설 속에 극적인 장면을 집어넣기 좋아하는 것도 도스토예프스키와 닮았다. 

이 작품 스무살--우리 나이로 22세--짜리 풋내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벌써 그의 작품은 , 조이스 이후의 문학, 즉 도스토예프스키식의 감정토로도, 쓸데없는 자기고백도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작 스무살 짜리 소년이 이런 소설을 쓰다니, 프루스트가 말했듯이, 재능이란 종기처럼 저절로 터지는 걸까?

 물론 이 작품은 도스토옢스키의 처녀작처럼 아직 덜 성숙한 면이 있다. 하지만 역시 프루스트가 말한 것처럼, 위대한 재능이란 아직 인정되지 않은 때에도 어떤 감탄스러운 현상을 필연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하지만 (내 판단과는 달리) 모라비아는 이 작품으로 이탈리아의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라서버렸다.  그의 후기작에 비하면 덜 여문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자주 이동하는 시점의 이동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문학적 관행에 젖어있음을 드러낸다. 
 감탄, 감탄, 또 감탄하게 한다. 위대한 작품은 부도덕한 작품이 아니라, 부도덕해 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인물과 인물의 관계망을 전방향으로 사슬을 얽어버린다.

 한때 나는 선정적인 장면이 문학에서 드러나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 작가의 작품을 읽자, 그건 나의 편견이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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