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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평점 :
프라이와 프루스트는 예술과 문학에는 발전도 진보도 없다고 하지만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20세기 이후 문학은 '감정의 오류'에 빠져들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그리스문학부터 지금까지 이어져가고 있는 문학상의 차이는 형식의 변화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파토스에 대한 시각의 변화라고 볼 수도 있고, 미학과 윤리학의 기준이 조금씩 변해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문학이란, 철학과 미학, 윤리학이 삼각형의 세 점의 꼭지점으로 지탱되어야 작품으로서 존재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미학을 제거하고 문학을 바라본다든가, 혹은 윤리학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텍스트는 만들어질 수도 없고, 분석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그리스 이후 문학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 것일까? 처음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읽었을 때, 나는 당혹감이 내재된 폭소를 터트린 장면이 있다. 그들은 잔혹함에 대한 연민 같은 부분은 의도적으로 텍스트에 구현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이 감정에 연루되어 있다는 말은 어떤 부분 옳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오늘날 문학작품보다 더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소설은 점점 윤리적인 감각이 모호한 상태가 되어간다. 무감각함과 모호함은 다르다. 이제는 독자가 작품 속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출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19세기 소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현대소설의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가와 독자들이 동의하는 작품은 윤리, 이데올로기, 종교와 무관한 작품은 없다. 프라이 말대로 문학과 예술은 변하는 듯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다.
마르케스는 카니발성을 가진 작가인 반면, 칼비노는 카니발성과 반소설적인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반소설이란 영미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들의 안티 로망을 지칭하는 것이며 누보로망과는 무관하다. 반소설과 카니발은 비슷한 속성을 가진다. 카니발은 관념과 이미지의 순간적인 위치이동이라고 한다면, 반소설은 한번 텍스트 속에서 구현되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관념의 왜곡화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카니발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가 되지만, 반소설은 고정화되어 있는 가치관의 조롱으로 드러난다. 칼비노는 생각보다 복잡한 작가인 듯하다.
그는 스포이드의 물을 떨어뜨려 리트머스 시험지에서 서서히 번저나가는 감동, 그 감동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