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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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젠가 리차드 브라우티건의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 하나는 작가 자신의 소설 속에 나타난 재료들 중 사물과 인간은 특별하게 구별지을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그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약간의 당황스러움을, 조금 후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 아니겠냐고 잠정적으로 결론지었다. 브라우티건이 살고 있는 시대는 이미 근대를 한참 벗어난 지금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외국인이 우리네 나라를 바라보면 나날이 솟아오르는 빌딩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한국의 모습을 '눈부신 발전'이라고 치켜세울 때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고작 100년 아니 10년도 못가 부서지는 건물들을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고 놀라는 그들은 1000년의 위엄을 가진 석조건물들을 가진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눈부신 발전'이란 달리 말해 근대와 현대를 동시에 진행시키고 있는 기형적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거대한 괴물을 읽으면서 브라우티건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폴 오스터는 비교적 젊은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브라우티건보다 소설을 대하는 방식에서 고전적인 면을 더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픽션을 구성하는 쪽보다는 픽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쪽으로, 소설은 반영의 매체가 아니라 반성의 매체로 나아가는 일련의 운동을 하는 동안 아직까지도 고집스럽게 관계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그는 흥미롭다. 적어도 내겐..
픽션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소설은 일반적으로 19세기 러시아 작가들과 프랑스 작가들이 만들어 낸 어떤 구조물을 말하는 듯한데, 소설이 읽히지 않는 이유는, 고전이 읽히지 않는 이유는 독자가 너무 영악해진 것과 작가가 당대인의 의식구조를 따라가지 못하는 쪽 양쪽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나는 사람들이 고전을 읽지 않는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들이 고전을 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불행하지도, 무식하다는 소리도 듣지 않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나는 어떤 고전을 좋아하는 데 이건 하나의 취향에 불과한 것 같다.)
우리가 입수하게 되는 모든 뒤틀린 정보 중 원하는 것은 진실일까? 아니면 믿고 싶은 어떤 것일까? 작가는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내게 그런 질문을 던져왔다.
그것은 19세기 작가들의 한계점을 지적한 부분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질문들은 소설이 공룡처럼 멸종되지 않기 위해서 끊없이 몸부림을 쳐야 하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나는 이 작가가 만들어내는 관계의 도석성--엄밀히 말해서 우연성과는 조금 다른데--이 가끔씩 신경에 거슬린다.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관계까지도 얽어매는 뻔뻔스러움은 어쩔 수 없는 자신의 한계인 것인가?
어쨌거나 이 작품으로 인해 나는 폴 오스터가 갑자기 친구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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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 최후의 날
빅토르 위고 지음, 한택수 옮김 / 궁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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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나라에도 국민들의 사랑을 온 몸에 받은 작가들이 있다. 러시아의 푸쉬낀, 영국의 디킨스, 미국의 마크 트웨인, 그리고 프랑스의 위고이다. 하지만 아마도 생존당시에 위고만큼 대중의 존경과 지지를 받은 작가는 없었으리라.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죽자 수만의 인파과 광장에 몰려들었다지만) 오늘날 프랑스 비평계에서는 위고보다 (오랫동안) 무시해 왔던 발자크를 더 높이 쳐주고 있는 형국이다.  왜 그럴까? 리얼리즘이 로맨티시즘보다 더 인간의 본질에 다가서 있기 때문인가? 어쨌거나 위고는 비평가가 존중해 주지 않아도 여전히 사랑받을 만한 작가다. 지드가 프랑스 최고의 시인은 (유감스럽지만) 위고라고 한 표현은 어느 정도 정당한 대우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역시 위고의 낭만주의보다는 발자크나 스탕달의 리얼리즘이 인간의 본질적 모습과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그런데 그의 작품을 들게 되면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점점 오바하다가 어느 순간 감동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리고 만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는 말이 있다. 이 작품은 위고의 처녀작임에도, 심오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쓴 후, 3년이 지나 다시 수록한 서문이 훨씬 감동적이었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문장이 차츰 제 모양의 근육질이 만들어져서인가? 픽션보다 논픽션이 더 진실을 말해주고 있어서인가? 
 

1. 사형제도, 무용한 것인가? 아니면 필요악인가? 

 우리나라에도 배심원 제도 도입을 심각하게 검토해 본다는 말을 몇 년 전에 들은 적이 있다. 보다 형평성 있는 재판을 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재판관 자신의 결정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기 위함인지 취지는 잘 모르겠다. 과연 배심원 제도는 인간을, 약자를,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해질 수 있는 제도인지에 대해서는 심히 의심스럽다. 아마도 이 제도가 도입되자마자 (서로) 중요한 형사사건의 배심원이 되고 싶어서 안달할 것이다. 이건 복권과 다름없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많은 배심원들이 돈에 매수당할 것이다. 물론 법 앞에서 한 사람은 구제되기는 할 것이다. 가진 자들의 횡포는 점점 더 심해질 것이고, 돈의 위력은 더욱더 강화될 것이다.

인터넷은 새로 등장한 마녀사냥용 도구요, 고문 도구다. 물론 이 말은 인터넷 문화를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보았을 때 가능한 말이다. 연예인 X가 폭행으로 기사화되면, 빗발치듯 돌을 던진다. 누군가가 이혼을 하면 그 사람의 사생활 자체를 도마 위에 올려서 회를 치기 시작한다. 오늘날 인간은 어떤 경우에는 19세기 전지적 화자를 등장시켜서 소설을 쓴 대작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타인이 전지적 화자인듯한 포즈를 잡으면 참지 못한다. 모두다 신이면서, 모두다 저마다의 불꽃을 활활 태우고 있다. 신을 죽임으로써 인간은 종교가 가진 폭력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지만 새로운 악을 또다시 키우고 있다 '이런 일들은 어쩌면 모두 일기를 인터넷에서 쓰기 때문이 아닐까?

 

“사형이야!”
군중들이 말했다. 내가 끌려나오자 모든 사람들이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이 소란스럽게 내 뒤를 좇아왔다. 나는 취한 사람처럼 멍하니 걸었다. 방금 내 안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사형이 언도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나는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다른 사람들과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사람들과 나 사이에 칸막이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뚜렷이 느꼈다. (18-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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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퀼로스 비극 - 희랍어 원전 번역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단국대학교출판부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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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에포로이는 국역하면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이 된다. 아마도 천병희 교수는 희랍어와 일 대 일 대응하는 모국어가 없어 번역하지 않고 놔 둔 것 같다. 사실 어떤 언어와의 번역도 일 대 일 대응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 말을 외국어로 번역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리스가 단지 신전에 제례를 바치는 문화가 발달했기에 코에포로이라는 명사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이 작품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2부에 해당한다. 1부와 2부는 3부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에 불과하다. 각 부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뭔가 마무리가 되지 않은 듯한, 이야기가 진행될 듯한 여운을 남기고 다음 부로 넘어간다. 그건 오늘날 열린 텍스트라고 말하는 개념과는 조금 다른데, 그것은 작가 스스로가 독자(관객)에게 던진 질문이 아직 어떤 식으로도 제시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트레우스 가문은 많은 그리스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은 제우스의 5대손이다.<제우스->탄탈로스->펠롭스(니오베)->아트레우스,튀에스테스(딸 펠로피아와 관계를 가져 아이기스토스를 낳음)->아가멤논, 메넬라오스->오레스테스, 엘렉트라, 이피게네이아)
제우스의 아들 탄탈로스는 신들의 전능성을 시험해 보고자 아들 펠롭스를 죽여 그 고기로 음식을 장만해서 신들 앞에 내놓는다. 모든 신들은 그 고기가 어떤 고기인지 알아차리고 수저를 들지 않았지만, 하데스에게 납치된 딸 페르세포네의 행적을 알지 못해 슬픔에 잠겨 있던 데메테르는 부주의하게도 어깨의 일부를 먹었다. 신들은 펠롭스를 도로 살려주고 없어진 어깨를 상아로 대치해 준다. 그리고 탄탈로스는 하데스에서 영원한 허기와 갈증의 고통에 시달리는 죄과를 치르게 한다.
탄탈로스의 딸 니오베는 테바이 왕 암피온과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각각 일곱을 슬하에 두는데, 어느날 쌍둥이 남매밖에 낳지 못한 레토 여신보다 자기가 자식을 더 많이 낳았다고 자랑하다가 신들의 노여움을 산다. 그래서아폴론은 아들 일곱을, 아르테미스는 딸 일곱을 모두 쏘아 죽인다. 그러자 니오베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돌기둥으로 변해 버린다.
탄탈로스의 아들이자 아가멤논의 할아버지 펠롭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간다. 그는 엘리스 왕 오이노마오스의 딸과 결혼하려고 하는데, 그 조건은 오이노마오스와의 전차경주에서 승리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오이노마오스의 마부 뮈르틸로스를 매수하여, 경주 때 바퀴가 빠져 왕이 전차에서 떨어져 죽게 만든다. 하지만 펠롭스는 마부에게 보수를 주기는커녕 그를 바다에 던져 죽인다. 그때부터 그의 가문에 저주가 시작된다. 그의 아들 아트레우스가 뮈케나이의 왕이 되었을 때 튀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의 아내 아에로페를 유혹하려다 발각되어 추방된다. 후에 아트레우스는 화해하자면서 튀에스테르를 부르고는 그의 두 아들을 죽여 음식을 만든 뒤 잔치를 벌인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아챈 튀에스테르는 달아나면서 아트레우스 가문을 저주한다. 튀에스테르는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딸 펠로피아와 관계하여 아이기스토스를 낳는다. 그러니까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의 고종사촌이자 삼촌인 셈이다.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이 트로이로 원정간 사이에 그의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유혹한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출정의 제물로 바친 남편 아가멤논에게 원한을 품었고, 아이기스토스는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자신을 추방한 아트레우스 가문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다. 해서 아가멤논이 트로이를 함락하고 돌아온 날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아가멤논을 죽인다.
1부 아가멤논은 아가멤논이 귀국해서 돌아오는 날을 시간적 공간으로 하고 있다. 죽음이 예비되는 것은 아가멤논과 함께 돌아오는 전리품이자 예언자인 카산드라에 의해서이다. 만약 이 작품이 셰익스피어나 라신에 의해 쓰여졌다면 살인이 일어나기 전 대사를 읊조리는 것은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독백체에 의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아이스퀼로스는 오히려 클뤼타이메스트라에게 효부의 이미지를 초반에 심고 있다. 물론 이것은 아이러니의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신화였으니까. 이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은 아트레우스 가문의 역사 혹은 야사를 대부분 죽 꿰고 있었으리라. 오히려 이 작품의 극적 아이러니는 클뤼타이메스트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코로스에 의한 것이다. 코로스는 그리스 희곡의 한 가지 특징이긴 하지만 그리스 희곡의 전유물은 아닌 것 같다. 이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서 주요 등장인물을 제외한 인물들이 담당하는 기능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연출하는 부분들이 정형성을 띄고 있고, 역할이 다른 어떤 시대의 작품들보다 더 중요성을 띄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카산드라는 미래를 내다 볼 수 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예언자라기 보다는 예지자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죽음을 불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순응한다. 그것은 아이스퀼로스가 숙명론자이고 운명극을 쓰는 자이어서인가? 그것이 고대 희랍인들의 사고방식이었을까?
그것보다는 이 희곡의 뿌리(줄거리)에 기인하는 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예언의 힘을 아폴론에게 부여받았다. 하지만 아폴론의 아이를 가지기를 거부했기에 그녀의 능력은 아무 소용없는 재주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과 아가멤논의 죽음을 알 수 있었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1부에서 만들어지는 클뤼타이메스트라라는 인물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와의 결합을 위해서 아가멤논을 죽인 것이 아니다. 이 희곡의 대화 속에는 그런 말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다만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 죽음에 이르게 한(실제 그녀는 죽지 않았다) 것에 원망을 품은 것이다. 그런데 2부를 읽으면 그녀는 자신의 딸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이아를 추방해서 빈곤에 허덕이게 만든다. 모성애를 가진 인물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2부의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지극한 모성애가 불러오는 비행의 여주인공인 1부의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전혀 다른 인물로 보인다. 이것은 아이스퀼로스의 실수인가? 아니면 단순히 1부에 나타난 클뤼타이메스트라는 허영 그리고 자신마저 속이는 거짓말장이란 말인가?

이제 2부 코에포로이로 넘어간다. 아들 오레스테스가 드디어 등장한다. 그는 별 다른 주저없이 어머니를 죽인다. 이 충격적인 장면은 아이스퀼로스의 사상을 대변한다. 그는 부권중심 사회을 2부와 3부에서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독서가 조금씩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작가에게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작가와 독자가 사고나 가치관이 다른 것은 몰입하는 데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설득하는 방법, 혹은 형식에만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가 기원전의 그리스인이고 200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의 독자가 읽는 시대적 차이 때문에 일어날 문제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의 사상이 어떤 방향으로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아이스퀼로스는 에우리피데스나 소포클레스에 비하면 영 호감이 가지 않는다. 만약 이 작품의 주인공이 오레스테스가 아니라 엘렉트라였다면 정신분석적으로나 품격적으로나 더 훌륭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다시 2부로 돌아간다. 이 작품은 후에 세익스피어의 위대한 희곡 햄릿의 원형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두 작품 다 비극이다. 간부들을 죽인다. 그리고 그 간부는 자신의 삼촌이다. 주인공은 모두 왕의 자식이다.
하지만 햄릿의 비극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햄릿에게는 살인을 저지르기 전 내적 갈등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실제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일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일들이 훨씬 흥미롭다.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말을 포함해서
그리고 또 커다란 차이가 있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죽인 결과에 대한 심판을 받고,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받는다! 어머니를 죽여도 되는 사회에서 그는 살고 있다! 햄릿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증오로 갈등한다. 돌아버릴 것만 같은 내적갈등에 시달려서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돌아버린다. 약혼자 오필리어도 덩달아 돌아버린다. 집안을 온통 피바다로 만든 후 주인공 햄릿마저 죽어야지 이 비극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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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단국대학교출판부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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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안티고네 


고전작품들 중에서 작품의 제목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오이디푸스왕부터 시작해서 햄릿으로 시작되어 까라마조프까지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심지어 어떤 평론가들은 순문학과 대중문학의 잣대를 제목만 보고도 판별해 낼 수 있을 정도라는 말을 꺼낼 정도다. 실제로 위대한 작품의 제목은 인물 중심의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 인물이 제목이 되는 경우 주인공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몇 가지 예외들은 있다. 아이스퀼로스의 작품 오레스테스 3부작의 1부 <아가멤논>의 주인공은 아가멤논이 아니다. 그렇다고 오레스테스도 아닌 애매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1부와 2부는 완결된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대 서사에서 많이 보이는 <열린 구조>이어서가 아니다. 비극의 특징인 카타르시스를 각 부의 종결부에서 느낄 수 없다. 관객은 3부가 시작되길 무한정 기다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안티고네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안티고네다. 인물은 작가의 정신에서 분열되어 나온 세포와 같다. 그 인물들 중 가장 주제와 밀접한 인물이 바로 주인공이라고 생각해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한 사람의 작가의 작품에서 유사한 인물이 나오는 이유도 그런 이유다.

그러면 소포클레스는 이 작품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안티고네는 이 작품에서 가장 많은 사상적 대결을 펼친다. (다만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퀼로스보다 덜 정치적이고 에우리피데스보다 덜 철학적인 부분은 있다) 왜 안티고네는 이스메네와 크레온와 언쟁을 벌이는가? 안티고네라는 인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세속적인 인물과 보편성을 가진 인물은 크레온과 이스메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동질감을 느낄 정도로 오늘날의 인간의 모습, 서사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과 유사하다.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반면 안티고네는 테바이의 왕권보다 자신의 오빠에 대한 사랑을 더 중요시했다. 그녀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오빠의 시신을 거두려고 한 인물이다. 이 모습은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벌하는 오이디푸스 왕의 모습과 유사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 비극에는 주인공이 정해져 있다. 그들은 위대하고 숭고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이 주인공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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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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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서사는 구멍 뚤린 서사다. 하나의 삽화 속에 내재된 정보는 또다른 수수께끼를 만들어낸다. 그의 정신을 찾는 여행을 떠나는 자를 영원한 미궁 속에서 헤메도록 만든다. 그렇다, 만은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일상과 개연성은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됨을 알고 있었다.

 

 삶(불,소년)과 죽음(바다,노인)으로 양분된 두 세계에서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인물 앗센바하는 삶에 대한, 다시말해서 불멸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불가능하기만 한 영원한) 삶을 희구한다. (이 소설을 단순히 토마스 만의 동성애적인 경향을 밝히는 소설이라고만 본다면, 토마스 만의 진의를 읽기 힘들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은 생(불멸)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그리고자 만들어낸 작품 같아 보인다. 그래서 만은 (나보코프의 롤리타처럼) 이성을 등장시키지 않은 것 같다. 어쨌거나 만의 연구자들, 그리고 정신분석자들은 이 작품을 동성애적 죄의식이라는 맥락으로 해석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읽는 사람의 자유의사이겠지만, 분명 감동은 적다) 

 

 예술가는  사업가나, 정치인 못지 않게, 아니 더욱 세속적이면서도 극단적인, 부질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내어서 불멸을 꿈꾸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허황된 욕망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돈 키호테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신병에 가까운" 신념을, 주변의 협공을 들을 때마다 청각을 스스로 마비시키는 그런 자세를 존경한다.

 앗센바하는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정말 토마스 만의 분신인가? 그는 진정으로 예술을 위한 삶을 살았는가? 그는 불멸을 꿈꾸는 자인가? 결론지을 수 없는 인물을 만들어내었기에 토마스 만은 위대한 작가다. 그의 서술은 결코 단정적이지 않다. 그의 단정은 끝없는 모호함을 만들어 낸다. 모호함을 위한 서술, 역설을 동반한 서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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