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형수 최후의 날
빅토르 위고 지음, 한택수 옮김 / 궁리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어느 나라에도 국민들의 사랑을 온 몸에 받은 작가들이 있다. 러시아의 푸쉬낀, 영국의 디킨스, 미국의 마크 트웨인, 그리고 프랑스의 위고이다. 하지만 아마도 생존당시에 위고만큼 대중의 존경과 지지를 받은 작가는 없었으리라.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죽자 수만의 인파과 광장에 몰려들었다지만) 오늘날 프랑스 비평계에서는 위고보다 (오랫동안) 무시해 왔던 발자크를 더 높이 쳐주고 있는 형국이다. 왜 그럴까? 리얼리즘이 로맨티시즘보다 더 인간의 본질에 다가서 있기 때문인가? 어쨌거나 위고는 비평가가 존중해 주지 않아도 여전히 사랑받을 만한 작가다. 지드가 프랑스 최고의 시인은 (유감스럽지만) 위고라고 한 표현은 어느 정도 정당한 대우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역시 위고의 낭만주의보다는 발자크나 스탕달의 리얼리즘이 인간의 본질적 모습과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그런데 그의 작품을 들게 되면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점점 오바하다가 어느 순간 감동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리고 만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는 말이 있다. 이 작품은 위고의 처녀작임에도, 심오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쓴 후, 3년이 지나 다시 수록한 서문이 훨씬 감동적이었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문장이 차츰 제 모양의 근육질이 만들어져서인가? 픽션보다 논픽션이 더 진실을 말해주고 있어서인가?
1. 사형제도, 무용한 것인가? 아니면 필요악인가?
우리나라에도 배심원 제도 도입을 심각하게 검토해 본다는 말을 몇 년 전에 들은 적이 있다. 보다 형평성 있는 재판을 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재판관 자신의 결정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기 위함인지 취지는 잘 모르겠다. 과연 배심원 제도는 인간을, 약자를,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해질 수 있는 제도인지에 대해서는 심히 의심스럽다. 아마도 이 제도가 도입되자마자 (서로) 중요한 형사사건의 배심원이 되고 싶어서 안달할 것이다. 이건 복권과 다름없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많은 배심원들이 돈에 매수당할 것이다. 물론 법 앞에서 한 사람은 구제되기는 할 것이다. 가진 자들의 횡포는 점점 더 심해질 것이고, 돈의 위력은 더욱더 강화될 것이다.
인터넷은 새로 등장한 마녀사냥용 도구요, 고문 도구다. 물론 이 말은 인터넷 문화를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보았을 때 가능한 말이다. 연예인 X가 폭행으로 기사화되면, 빗발치듯 돌을 던진다. 누군가가 이혼을 하면 그 사람의 사생활 자체를 도마 위에 올려서 회를 치기 시작한다. 오늘날 인간은 어떤 경우에는 19세기 전지적 화자를 등장시켜서 소설을 쓴 대작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타인이 전지적 화자인듯한 포즈를 잡으면 참지 못한다. 모두다 신이면서, 모두다 저마다의 불꽃을 활활 태우고 있다. 신을 죽임으로써 인간은 종교가 가진 폭력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지만 새로운 악을 또다시 키우고 있다 '이런 일들은 어쩌면 모두 일기를 인터넷에서 쓰기 때문이 아닐까?
“사형이야!”
군중들이 말했다. 내가 끌려나오자 모든 사람들이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이 소란스럽게 내 뒤를 좇아왔다. 나는 취한 사람처럼 멍하니 걸었다. 방금 내 안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사형이 언도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나는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다른 사람들과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사람들과 나 사이에 칸막이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뚜렷이 느꼈다. (18-1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