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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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은 감수성이 풍부한 청소년과 청년시절에 읽어야 제 맛이다. 그러나 그런 여건이 되지 못한다. 그래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고자 하는 개의 심정으로, 문학서적을 손에 잡고는 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나는 놀라고 말았다. 나에게도 아직 감수성이 실아 있음을 느꼈다. 어쩜, <노인과 바다> 이 책은 지금 더 내게 풍성한 의미를 준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마지막 작품으로(1952년), 이 작품으로 퓨리쳐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등장인물은 노인 산티아고, 소년 마놀린, 그리고 바다와 물고기들과 새들 정도이다. 어쩜,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와 단순한 등장인물로 큰 상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에는 무슨 특별한 것이 있단 말인가. 그저 짧다는 이유로, 유명하다는 이유로, 부담없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고 말았다. 문학의 목적은 카타르시스이다. 내 마음에 카타르시스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자각이 일어나고, 내 실존이 보였고,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노인은 한 물 간 어부가 되었다. 왕년엔 대단했다. 그러나 지금 84일간 고기를 잡지 못한다. 이것은 한 때 유명했으나 이제는 글을 쓰는 영감이 떨어져서 퇴물이 되어가는 헤밍웨이 자신의 상황이었으리라. 노인은 '큰 물고기'를 잡고야 말겠다고 포기하지 않고 바다에 나간다. 소년 마놀린는 이 노인을 '최고의 어부'라고 존경하고 따른다. 노인은 겸양하며 훌륭한 어부들이 따로 있다고 한다. 그러나 소년은 분명히 말한다. "최고의 어부는 할아버지예요." "오직 당신 밖에 없어요." (There is only you.) 와~ 이런 말을 해주는 그 누군가가 우리는 필요하다.

 

노인은 홀로 바다에 나갔다. 어떤 이는 바다를 경쟁자, 적대자(엘마르)로 보지만, 노인은 바다를 애인(엘마르)으로 본다. 바다에서 나온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바다는 인생을, 우리의 직업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이 책은 더욱 흥미로워졌다. 홀로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노인은 홀로 대화하고, 군함새와 대화하고, 바다와 자기 자신과 대화한다. 작가가 묘사하는 바다 색깔, 노인의 내면의 심정 등이 재미있다.

 

마침내 큰 물고기를 잡았다! 노인은 3일간이나 이 큰 물고기와 싸움을 한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상황, 순간 순간 변하는 상황에 대처하는면 3일간 사투를 벌인다. 노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할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다. 큰 물고기와 대화를 한다. "너를 존중한다. 너를 보고 싶다. 그러나 나는 너를 잡아야 한다." 이 큰 물고기는 작가에게는 글쓰기 소재나 파토스일 것이고, 사업가에게는 대박을 말할 것이고, 개인의 한 인생에서 위대한 업적을 말할 것이다. 그런 '큰 물고기'를 만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다. 설령 큰 물고기가 걸렸다고 해도, 그 큰 물고기와 씨름해서 낚아 올리는 것은 대단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때로는 노인이 되기도하고, 때로는 큰 물고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이입은 과정은 현재의 고단한 삶의 긴장을 풀어내는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한다.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노인은 마음을 지키고, 생선회를 먹으면서 몸의 건강을 유지하고, 낚시 줄을 붙잡느라고 쥐가 나고 피가 나는 몸을 잘 추스리며 사투를 벌여야 했다. 마침내, 큰 물고기를 잡았다. 큰 물고기는 고깃배보다 더 크다. 18피트(약 6미터). 그렇다. 인간이 이루는 업적은 참으로 대단하다. 자기 보다 큰 물고기를 잡아올리는 것과 같다. 인간은 위대하다. 노인은 상상도 못한 대어에 희열을 느끼고 행복해한다. 꿈을 꾸는 것만 같다.

 

이제 쿠바의 하바나 항구로 돌아가야 한다. 인생의 정점이 있으면 내려놀 때가 있다. 큰 물고기를 배에 묶고 가는데 상어들이 피냄새를 맡고 계속 공격해온다. 공격해오는 상어들과 싸움을 또 벌인다. 이제는 잡은 큰 물고기를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다. 항구에 돌아왔을 때는 큰 물고기의 머리와 꼬리 그리고 뼈밖에 남지 않았다. 허무하게 큰 물고기를 보존해서 오지 못했다. 그저 이 노인의 영웅적인 이야기만 막연하게 회자될 뿐이다.

 

내가 이 소설에서 재미있던 부분은 바다를 대하는 노인의 태도(인생과 자기 일을 대하는 개인의 자세),  그리고 노인의 독백들, 큰 물고기와 노인의 팽팽한 긴장관계 등이다. 정말 현실은 큰 물고기를 잡은 노인처럼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큰 물고기에 끌려가는 것인지, 큰 물고기를 잡고 가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또 큰 물고기를 포기할 수도 없고, 큰 물고기를 잘 지켜서 항구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고,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항구까지 도달하는 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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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개념 키르케고르 선집 3
키에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 / 다산글방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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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폴 틸리히의 <기독교 사상사>에서 틸리히는 우리가 읽어야할 키에르케고어의 책 가운데 2권을 필독서로 추천한다. <불안의 개념>(1844)<죽음에 이르는 병>(1849)이다. <불안의 개념>을 읽으면서, 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가 얼마나 키에르케고어에게 영향을 받았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불안의 개념>은 아담의 원죄에 대한 심리학적인 분석을 한다. 1-2장은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논박으로 썼기 때문에 아주 난해하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무한한 자유로 인하여 인간은 불안하여 죄를 짓는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공포는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무에 대한 불안'이다.

 

<불안의 개념>5장으로 되어 있는데, 다행히 5장은 짧다. 5장에 모든 엑기스가 담겨 있다.

불안이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가 아니라, 구원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방법은 불안의 온전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불안에는 유한성에 대한 불안과 무한성에 대한 불안이 있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유한성의 불안이 무한성의 불안보다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착각이다.

 

유한성의 불안이란, 인간의 의식주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불안이다. 취직, 결혼, 집이나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 등에 대한 염려이다. 무한성의 불안은, 하나님 앞에서의 불안이다.

인간은 무엇을 먹고 사느냐에 대한 유한성의 문제보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느냐 하는 '무한성의 불안'이 더 큰 문제이다. 간단히 말해서 '무한성의 불안'을 해결한 사람은, '유한성의 불안'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한성의 불안을 어떻게 해결하나? 그것은 우울증 약으로 해결되지 않고, 자살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왜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하게 되는가? 이 불안의 습격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불안은, 그 어떤 대심문관 보다도 철저하게 우리의 죄를 샅샅이 찾아낸다. 그 어떤 비밀요원보다도 철저하게 우리의 내면을 뒤져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찾아내어 불안하게 만든다. 그 어떤 판사도 불안 만큼 완전하게 우리를 판단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불안은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우리 안에 있는 유한성을 의지하는 것을 철저히 고발한다. 다시 말해서, 은행의 잔고, 세상의 명예, 육체적인 건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불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불안은 우리 안에 하나님 외에 다른 유한한 것을 의지하는 것을 철저히 고발한다. 그리고 그것은 '썩은 밧줄'로 우리가 의지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고발한다.

그럼, 이 원수와 같이 철저히 우리의 내면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불안을 어떻게 상대하는가?

그 방법은 불안을 도피하지 말고, 환영하는 것이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위하여 독배를 마시듯이, 불안을 받아들여라.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네 할 일을 속히 하라" 하시면서 의연하게 인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시듯이, 의연하게 불안을 받아들여라. 수술을 앞둔 환자가 의사에게 ", 준비 되었어요. 잘 해주세요."라고 말하듯이, 불안이 우리에게 엄습할 때, 불안이 할 일을 다 하도록 자신을 열어두어라.

 

역설적으로, 불안은 우리를 숨막히게 하고 파멸로 몰아내지만, 불안의 온전한 제자가 된 사람은 불안을 환영한다. 불안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영하는 사람은, 불안이 우리 내면에서 빼앗아가고자 하는 모든 것들 - 기쁨, 평안, 감사, 사랑의 능력 등-을 모두 돌려받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안의 완전한 제자가 되느냐? 그 불안을 구원의 징검다리로 사용하라.

그 불안 앞에서 우리가 유한한 것을 의지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한하신 존재, 인간의 궁극적 관심인 하나님을 바라보라.

 

어떻게 그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Atonement)를 바라보라.

불안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만 해결된다. 하나님 안에서 불안은 그리스도인의 좋은 시종꾼이 된다.

* 임춘갑, 임규정 등의 번역에, <구원>Salvation의 징검다리로 마지막 줄을 번역했는데, 더 정확한 번역은 <대속>Atonement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그 구원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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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밤 믿음의 글들 322
C. S.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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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가 익숙한 믿음생활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그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C.S.루이스의 솔직한 질문과 재치있는 답변들은 처음에는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을 낯설게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질문과 답변을 따라가다보면 우리가 무엇을 믿으며, 그 믿는 바를 깨닫고 있는지 확인하게 되고, 어떤 유익이 있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에 앞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던지는 7가지 질문과 그에 따른 아주 자연스럽게 풀어가는 저자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1. 기도는 효력이 있는가?

2. 그리스도인들의 고집스러운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3. 교양 있어 보이고 싶은 사람과 정말로 교양 있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4. 악마는 인간의 어떤 약점에 환호하는가?

5.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물은 선한가?

6.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무너지는가?

7. 이 순간이 세상의 마지막 밤이라면 어떻게 될까?

내가 주목하는 것은 7번째 물음이다. 예수님은 재림하시는가? 성경은 말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말씀하신다.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행1:11)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이후의 자연스러운 진행이다.

 

재림신앙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다. 초대교회의 인사는 '마나나타'(그 뜻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였다.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서 보이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육신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을 통하여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예수님의 재림을 통하여 완성이 된다.

 

재림신앙에 대한 거부감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의 재림이 예수님이 당시 팔레스타인의 묵시문학에 심취했던 영향을 받았을 뿐이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아니라는 자유주의자의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당시 묵시문학을 만연해 있는 유대사회의 문화와 사상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론은 기독교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마치 사회를 어지럽히고 동요시키는 '시한부 종말론' 쯤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래서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열광주의 정신병자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예수님의 재림'과 '기독교 종말'에 대하여 도외시하는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교회의 강단은 마땅히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종말을 선포해야만 한다. 악과 사탄과 죄의 세력을 멸하고 하나님의 의와 희락과 평강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함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바로 깨달아, 이 땅에 육신을 위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고 드리며 주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가야 할 사명을 가진다.

 

"때와 기한은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만 아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의심하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참 구원자가 되심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인성을 가지신 분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때와 기한을 말하여 사회를 혼란하게 했던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의 핵심은 '예측불가능성'에 있다.

1. 그분은 분명히 돌아오실 것입니다.

2. 우리는 그 때가 언제인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3. 그러므로 항상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모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항상 깨어 근신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늘 종말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종말을 언제나 기억하고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밤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까?) 존 던의 싯귀의 한 부분을 늘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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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크랩의 네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라 -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행복 법칙
래리 크랩 지음, 윤난영 옮김 / 살림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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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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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상담학 개론
LAWRENCE CRABB 지음, 전요섭 옮김 / 아가페문화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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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중심의 삶과 내 중심적인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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