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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문보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에는 다양하고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나오는데. 읽기에 재밌으면서도 가슴 한편이 찌릿하게 아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제목처럼 다정하지만 미움에 관한 이야기. 미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렇게 시적이고 솔직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면서도. 나 또한 작가님의 글에 감정 이입이 충실하게 되는. 상당한 매력을 가진 에세이라서 한 장씩 읽을수록 빠져들게 된다.
이 책과 함께 한 시간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졌다. '다정'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큰 힘을 가진 것 같다. '다정'이라는 것보다 더 큰 힘은 없게 느껴질 만큼. 사회에서 '다정'에 다소 박한 일들을 여럿 겪다 보니. 소소하고 작은 '다정'에도 크게 따뜻함을 느끼고 감동하곤 한다.
이 책을 읽다 보니 특히나 무엇보다 나 스스로에게 조금 더 다정하지 못했던 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 나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작가님의 솔직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읽으면 희한하게도 상처받아 꾹꾹 눌러놓았던 나의 어느 부분을 툭툭 털게 만들어준다. 이 책에 있는 여러 글들이 고맙게 느껴진다.
작가님의 글은 본인의 감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굉장히 디테일해서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에피소드마다 느낀 감정에 최대한 솔직하고 감성적인 모습이 인상적인데. 나도 나의 생각을 이렇게 솔직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에세이 형식이지만 시처럼 이미지화된 글들이 많았고. 작가님 특유의 개성 있고 특이한 시각으로 쓰인 글들임에도 쉽게 공감하면서 흥미롭게 읽혔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글체를 지니신 분을 만난 것 같아서 반가웠다.
흡연구역(흡연구역은 내 친구의 이름이다)과 나는 서로에게 교회 같은 곳이다. 불행할 때만 찾아가는 곳. 행복할 때는 생각이 안 나는 곳. 우리는 안부전화 따위 하지 않으며 오직 사랑을 잃었을 때만 연락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매일 통화한다. -p.40
어떤 남자의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 카톡 상태메세지는 '여름'이다. 어느 순간부터 남자의 상태 메세지가 '여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는 '여름'이 무슨 뜻인지 물어 보지 않는다. 만나서도 물어보지 않는다. 헤어져서도 물어보지 않는다. 왜 물어보지 않는 걸까? 그는 역으로 궁금증을 앓게 한다. 그렇다면 이 남자와 결혼해도 좋겠다. -p.52
인생에서 가장 크고 다 급한 문제는 시간이 남아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남아돌기 때문에 사람들은 평평한 길을 걷다가 발을 삐고, 골목의 자판기가 고장 나며, 기르던 개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을뿐더러, 이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 운 좋게 키스를 받기도 하지만, 다음 날 발가락이 부러지는 식으로 인생이 흘러가는 것이다. -p.130
나는 천성이 우울증과 먼 인간인데 올해 처음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았다. 처음에는 병인지 모르고 방치했다. 나는 사는 방법을 까먹었다. '사는 방법이 뭐 따로 있나?'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 물을 마시고 자고 양치하고 산책하는 일상 자체가 파괴되었다는 뜻이다. -p.131
나는 '우산을 든다'는 표현보다 '우산대를 붙들다'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우선은 드는 게 아니라 붙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우산대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다. 그 구원의 밧줄을 잡고 우산이 이끄는 대로 걷는다. 타인과 걸어도 나는 타인의 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