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럴까.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합리적 인식‘이 아니라 ‘자신의 정서‘로 판단했다. 자신이 이해하면 선이고 불편하면 악으로 취급했다.
산다는 것은 언어를 갖는 일이며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기억했다.
˝우리가 충분히 배우고 우리의 눈과 귀를 충분히 연 경우 언제든 우리의 영혼은 더욱 유연하고 우아하게 된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다만 잘 쓴 글이든, 미완의 글이든, 숨겨둔 글이든, 파일로 저장하지 않고 날리는 글이든, 그런 과정 하나하나가 자기 생각을 정립하고 문체를 형성하는 노릇이며 ‘삶의 미학‘을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못 써도 쓰려고 노력하는 동안 나를 붙들고 늘어진 시간은 글을 쓴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기 한계와 욕망을 마주하는 계기이자 내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타인과 인사하는 시간이라고, 이제는 나부터 안달과 자책을 내려놓고 빈 말이 아닌 채로 학인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 어떤 글도 무의미하지 않다고, 우리 어서 쓰자고.
글쓰기는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동작이다. 낫이 아니라 낫질이다.
삶이란 ‘타자에게 빚진 삶‘의 줄임말이고, 나의 경험이란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의 합작품‘인 것이다.
인생이라는 책에서 한 페이지만 찢어낼 수 없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품고 가야 하는 것. 아픈 채로, 불편한 대로 안고 같이 살아갈 힘이 길러졌다. 삶이 다소 견딜 만해진 것이다.
시어는 생활어이지만 의미를 흔들고 뒤집는다. 시의 난해함은 삶의 난폭함에서 유래한다. 삶이 종잡을 수 없다면 삶을 받아낸 시도 그럴 수밖에.
하지만 평균적인 삶도 정해진 도덕률도 없다. 천 개의 삶이 있다면 도덕도 천 개여야 한다. 자기의 좋음을 각자 질문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게 중요하다.
메시지가 없는 미사여구의 나열은 공허하다. 지식은 넘치고 지혜가 빈곤한 글은 무료하다.
글에는 적어도 세 가지 중 하나는 담겨야 한다. 인식적 가치, 정서적 가치, 미적 가치. 곧 새로운 지식을 주거나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거나 감정을 건드리거나.
가장 큰 가난은 관계의 빈곤이다. 관계가 줄어들면 자아도 쪼그라들고 관계가 끊어지면 자아도 사라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