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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평점 :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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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오정연 작가의 sf 단편집이다. 과학과 우주 개척이 지금보다 더 멀리 나아가있는 어떤 세계를 배경으로 과학과 이성이 해결 못하는 감정, 기억, 순간을 공유한다. 그 어떤 발전도 가져올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필요로하는 다정한 무언가를 설명하고자 여러 편의 단편들을 쓴 느낌이랄까. 사실 가장 중요하고 고질적인 것들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인류애를 놓지 않은 섬세하고도 단호한 문장들은 우리가 놓치고 살아온 것들과 가지고 있음에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들을 재인식할 기회를 준다.
🔖나는 이 모든 우연을 가능하게 만든 ‘시작’부터 존재하는 전파를 가르며 별이 되는 중이다. 인간의 가장 소중한 기억들과 함께. 이만하면 충분히 아름답다. -224쪽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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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 그 죽음을 조력하는 안드로이드의 이야기 ‘마지막 로그’, 만 15세 즈음 모든 사람에게 내린다는 ‘단어’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와 아름다운 단어를 지닌 이누이트족 아이의 우정을 담은 ‘단어가 내려온다’, 화성 이주 1세대들이 화성에서 원격 제사를 지내는 ‘분향’, 화성에서 자란 화성 2세대인 미지가 지구로 2년간의 연수를 떠나게되며 준비하는 과정과 한 부모 가정과 가부장에 대한 통찰을 담은 ‘미지의 세계’, 부모님 몰래 제 2의 지구로 사파리 투어를 떠나는 미아의 이야기 ‘행성 사파리’, 인류의 기억을 끌어안고 우주를 여행하는 인공지능 영원이 들려주는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 기억관리자로 일하는 나와 나의 고객이 된 옛 연인과의 비대면 조우를 담은 ‘일식’ 까지.
어떤 단편이 제일 좋았다고 뽑을 수 없을 만큼 모든 단편이 다 너무 현현하게 아름답다. 과학이 너무나 발전한 어느 날이지만 그 속에서 삶을 꾸리는 인물들의 상황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다. 과학이 해결하지 못한 고질적인 갈등, 상실, 결핍, 방황의 문제들이 여전히 잔존해 있으며 속 시원한 해결은 하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은 풍요, 물질, 과학의 발전 같은 세속적인 물질의 것들이 아니라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연대, 교류, 감정 등 사사롭다 여겨진 것 들이었음을 환기시킨다.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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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과거의 기억들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정체성으로 확립되고 내면화된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을 이어받게 되는 다음 주자인 셈이다. 이어져 오는 기억의 연속성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삶을 아름답게 꾸려나가기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다음 주자에게 다정한 연대와 더 나은 내일을 건네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sf의 언어로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를 촘촘하게 설계해 낸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대된다.
🔖주어진 조건이 똑같다고, 사실 똑같지도 않지만, 그곳과 이곳의 시간이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고 확신할 수 없잖아요. 일란성 쌍둥이도 서로 다른 인생을 사니까요. -176쪽
🔖자꾸만 너와 눈이 마주치는 게 신기하면서도 그저 좋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나 처럼. 이전까진 나와 생물학적 성이 같은 사람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너를 사랑하는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그 충만함은 나라는 존재를 채워주는 마지막 한 조각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1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