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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 -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가 살아낸, 끝날 수 없는 생존의 기록
김잔디 지음 / 천년의상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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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견뎌 낸 시간과 그 고통의 무게가 한꺼번에 덮쳐오는 것 같았다. 책을 덮기도 쉽게 넘기기도 힘들었다. 그렇지만 꼭 기록되어야 할 책이다. 피해자의 용기에 감사드리고, 크고작은 희로애락이 있는 보통의 일상들을 같이 잘 살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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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 1 한길그레이트북스 20
이재숙 옮김 / 한길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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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진리를 두고, 여러 현명한 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도다' 리그 베다의 한 구절이다. 베다에서나, 우파니샤드에서나 중요한 의미를 두고 추구해간 것은 '하나의 진리'였을테지만, 2003년에 펼쳐든 우파니샤드 속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오히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는 바로 그 방식에 있지 않을까.

우파니샤드를 읽어나가면서 주목했던 것 중의 하나는, 신의 언어라 불리는 산스크리트어였다. 산스크리트어는 문자로 표현되는 것보다는 소리로 발음되는 것이 더 중시되지 않았을까 한다. 제례에서 내는 소리들도 신의 이름을 따서 의미를 붙인 것이다. 이러한 소리들의 절정이 바로 오움이다. 오움은 우파니샤드에서 설명하는 브라흐만이 문자화된 모습이며, 우주의 운용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샤 우파니샤드)이라고 설명된다. 먼저 나는 오움이 문자로서의 표현보다는 소리로서의 표현이라 말하는 것이 더 옳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오움이라는 소리 자체가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소리라고 한다. 몸의 단련과 마음의 단련이 함께 가는 것도 우파니샤드에서의 진리 추구이다. 그럴 경우에 공부는 우리의 일상과 존재와 떨어질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마음이야 하늘과 바다를 휘저을 수 있겠지만 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화의 본질이 극단적인 남성화의 길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더더욱 우파니샤드에서의 몸과 마음에 대한 철학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세상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남성들의 궁색한 변명거리가 있는데, 바로 '남자의 욕망은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정신)은 이성의 노예이면서 몸은 욕망(감정)의 노예라는 극단적인 구분에 갇힌 남정네들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성에 대한 찬미로 들끓는 남자들이 몸은 이성으로도 통제가 안된다니!) 그들의 몸과 마음이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점점 더 따로 놀게 된다면 큰일이다, 큰일.

또 한가지 우파니샤드에서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것이 바로 미혹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야라고 하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마야는 인간으로 하여금 제한된 시각을 갖게 하고 모든 것을 각각 다르게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파니샤드는 '참 실재에 비추어보면 이 세상이 실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그에 따르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미혹이며 마야인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미혹의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그와 동시에 미혹 그 자체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 불안정하고 거짓인 실재를 통해서만이 영원하고 변함없는 브라흐만의 자리로 갈 수 있다.'고 말함으로 해서 미혹의 상태를 긍정하는 것이다. 무지, 무명의 상태를 깨닫는 것, 무지를 아는 것은 지혜만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와 같은 설명이 가능한 것은, 미혹이 불혹으로, 무지가 깨달음의 지혜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한다. 보리수나무 열매를 쪼개면서 보이지 않지만 볼수 없는 미세한 힘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큰 나무가 있음을 믿으라고 하는 일화(찬도기야)에서도 보여지듯이, 그리고 서양의 철학이 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면, 동양의 철학은 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민정씨의 말처럼 우파니샤드에서도 그러한 믿음이 중요한 작용을 한다.

아직은 아뜨만이 아니고, 심지어 아뜨만을 깨닫지조차 못했음에도, 우리가 빠져 있는 이 미혹의 세계를 오히려 디딤돌 삼아볼 수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무궁무진한 미혹의 세계에 머물러 있고 싶다. 그러면서 나의 몸에서 마음으로, 다시 마음에서 몸으로, 부단한 노력과 열정이 조금씩 물꼬를 트면서 오갈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개개인의 영성은 그와 같은 삶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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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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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 그의 상상력과 표현력은 내가 읽은 <변신 이야기>가 비록 이윤기에 의해 서사로만 남았지만 원래는 '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시인의 눈이 아니고서야 사물과 감정에 대한 표현에 있어 그 정도의 공감을 이끌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윤기라는 번역자에 의해서 다시금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절감할 수 있었다.나는 잘못된 번역의 글을 읽을 때마다 상한 어금니를 새로 덧씌웠을 때 서걱거리던 느낌과도 같이 못내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윤기의 번역을 통해 새로이 바라보는 <변신 이야기>는 오히려 번역의 문장에서 우리말의 새로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그가 신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신화를 학문의 대상으로 여기고 정의하고 해석하기보다는 시적인 메타포어로 여기고 명상하고 즐기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신화를 '인문의 자연'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것처럼 나무신이 사는 안개 낀 숲, 금방이라도 여신과 무사이, 반인족과 요정들이 뛰어나와서 철벅이는 진흙늪과 수풀 사이를 누빌 것만 같은 이미지, 그 오래된 상상력의 원천.

이 신화적 세계에서는 유토피아에서처럼 무궁한 안녕이 없다. 인간은 재앙을 받고, 엇갈린 사랑이 비극을 낳고, 전쟁과 죽음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문학장르를 구분짓는 표현대로 이 신화의 세계는 투쟁이며 대결이다. 자아 내부의 투쟁과 갈등, 개인과 개인의 싸움, 자아와 세계의 대결. <변신 이야기> 속에서의 이 모든 갈등과 그것이 낳는 절망과 비극은 매력적이지만 그것만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이후의 가능성이다. 너무 완벽한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가능성이 이 신화 속에도 숨어 있다. 비극의 끝에 하늘의 별자리가 되거나, 인간에게 필요한 나무가 되거나 그것은 신들의 재앙을 받게 된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나는 아라크네를 뽐내다 망신당한 처녀라고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그녀의 솜씨는 여신보다 못할 것이 없었고, 그녀는 인간으로서 신에 대한 도전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변신 이야기>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제목 그대로 '몸 바꾸기'일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온갖 사물과 인간의 감정에 인격을 부여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다. 이 나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옛날에 어떤 아름다운 소녀가 신의 사랑을 피하다 그렇게 변했다는 식의 설명. 그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그치는 문제는 아닌 듯하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그리스 로마 신화를 르네상스라는 유리창을 통해서만 바라보았다. 르네상스에서 인문의 부활을 알리는 뚜렷한 흔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이 다시 활개를 펼치며 나타나게 되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세와 근대 사이 시대에서 신화와 신들이 다시 재서술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시대에 신화는 인간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소박하면서도 무한한 탐구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자연에 깃들어 있는 혼이 자신과 다를바 없다고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은 자연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게 된 것이다. 비록 그것이 후에 가위손으로 변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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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범우고전선 1
토마스 모어 지음 / 범우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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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의 가사를 들어보면 '하느님의 계획 아래 자신이 존재한다'는 내용의 노래가 많다. 모어도 <유토피아>에서 철저한 계획으로 짜여진 제도 아래 사람들을 살게 하려는 의도가 짙다. 그리하여 모어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유토피아를 그려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상징적으로 느껴지는 역설은 무엇일까?

그러나 <유토피아>는 모어가 살던 산업혁명 초기의 영국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의,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새로운 섬에 대해서의 유익하고 즐거운 저작>이라는 원제에서도 드러나듯이, 매우 유쾌한 책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모어의 조어법인데, 유토피아(어디에도 없는 곳)라는 말도 마찬가지이지만 폴릴레리타에(전혀 무의미하다), 아니드루스 강(물없는 강) 등과 같은, 모어가 만들어낸 말들이 유토피아 곳곳에 숨어 있는걸 보면서 나는 혹시 이 <유토피아>가 그 당시의 풍자코미디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토피아를 계획했다는 유토포스라는 인물은 어떻게 보면 플라톤의 철인왕과 흡사한 면이 있다. 지혜롭고, 철저한 계획을 세워서 나라를 만들었으며, 교육을 통해서 유토피아인들을 길러낸다. 그런데 고쳐 말하면 유토포스는 독재자였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의 남자친구와 함께 독재자에 대해서 논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석의 말은, 아주 도덕적이고, 생각도 깊고, 올바른 독재자가 나라가 확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바르게 되면 민주주의도 정착시키고 해서 자기는 권력에서 깨끗이 물러나면 된다나. 나는 이 말에 찬성을 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를 설득시킬만한 제대로 된 논거를 대지도 못했다. 그런데 모어 역시 이상적인 독재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과연 이상적인 독재자는 이상적일 수 있을까?

그리고 제 1권의 초기에 나왔던 라파엘과 영국변호사 간의 논쟁에서 쟁점으로 불거진 것들에 대해서 특히 주목을 해 본다. 산업혁명 당시의 영국은 자본주의의 발전 양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었고, 부자가 한없이 부자가 되는 한편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거지 도둑이 되는 사회였고 '도둑이 들끓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젯거리로 떠올랐다. 논쟁의 시초는 절도죄를 준엄하게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이름을 모르는 영국 변호사는 열렬히 찬성하였으며, 라파엘은 그렇다고 해서 도둑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라파엘(혹은 모어)과 변호사 사이에서의 이에 관한 두 가지 쟁점은 '도둑은 어떻게 근절될 수 있는가' 와 '가난한 사람과 도둑은 왜 생기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둑은 왜 생기는가'에 대해 라파엘은 변호사가 말한 '도둑은 유능한 군인이 되고, 군인은 모험적인 도둑이 된다'는 것에도 찬성하지만, 영국에서는 조금 더 특수한 경우가 있다고 설명한다. '아주 조금밖에 먹지 않는 것이 보통인 이 유순한 짐승이 이제는 사나운 식욕을 갖게 되어 사람까지 먹어치우게 된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리고 '비참한 빈곤에 따르는 가장 부조리하고 사치스러운 취미'가 다른 한 축을 이룬다. 두 번째로 '도둑은 어떻게 근절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변호사는 조그만 절도죄라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고, 라파엘(모어)은 '아무리 많은 재산이라도 인간의 생명과 맞먹을 수는 없다.'며 폴릴레리타에라는 곳에서의 방식을 예로 든다.

이 두 가지 쟁점은 그대로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한 관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유토피아/디스토피아에 대한 우리의 관심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한가지가 디스토피아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혹은 왜 생기는가? 에 대한 질문이다. 모어의 경우는 디스토피아가 생겨나는 원인을 아주 예리한 현실적 인식에서도 간파했지만, 도덕적인 기준 역시도 함께 들이댄다. 두 번째는 디스토피아는 어떻게 사라질 수 있는가? 에 대한 것이다. 모어는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서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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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1 - 현경 순례기 1
정현경 지음 / 열림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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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경, 높고 날카롭고 매끄러운 눈썹모양처럼, 그녀의 삶이나 글이나 감성에는 자신감이 넘쳐나는 듯하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흔히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강하며, 또한 다른 감성을 이해할 줄 모르는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데, 그녀 역시도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요즘 들어 느끼는 것은, 사람은 참 다양한 방식으로 성숙의 길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인것 같다. 그래서 나는 현경 그녀가 억수로 부럽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리고 아름답기 때문에. 참 행복해졌으면 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다 서점에서 처음 이 책을 펴들고는 서문과 살림이스트 선언을 보았을 때, 서문에서의 낯섬은 살림이스트 선언에서의 유쾌함으로 반전되어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현경 교수가 그렇게 유명한지 잘 몰랐었고,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지만, 적어도 여성의 아름다움, 여성의 힘, 그리고 에코 페미니스트로서 그것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듯하다.

또한 책에서 드러나는 그녀는 시원스럽게 길을 뚫어나가고 생각들을 밝혀나간다. 나의 경우는, 내가 옳다고 생각되는 사상들에 매몰되어 버리는 수가 많다. 내 감정들, 내 느낌들을 부정해버리거나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배경들에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아름답게 풀어낼 줄 아는 그녀의 모습에서, 참 많은 유쾌함을 느꼈다.

아는 선배는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말이 고급 냉장고가 있고, 화려하고 부유한 삶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여자라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를 읽으면, 진정으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앞으로 행복한 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그러기엔 아직까지 바꾸어나가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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