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니샤드 1 한길그레이트북스 20
이재숙 옮김 / 한길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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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진리를 두고, 여러 현명한 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도다' 리그 베다의 한 구절이다. 베다에서나, 우파니샤드에서나 중요한 의미를 두고 추구해간 것은 '하나의 진리'였을테지만, 2003년에 펼쳐든 우파니샤드 속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오히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는 바로 그 방식에 있지 않을까.

우파니샤드를 읽어나가면서 주목했던 것 중의 하나는, 신의 언어라 불리는 산스크리트어였다. 산스크리트어는 문자로 표현되는 것보다는 소리로 발음되는 것이 더 중시되지 않았을까 한다. 제례에서 내는 소리들도 신의 이름을 따서 의미를 붙인 것이다. 이러한 소리들의 절정이 바로 오움이다. 오움은 우파니샤드에서 설명하는 브라흐만이 문자화된 모습이며, 우주의 운용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샤 우파니샤드)이라고 설명된다. 먼저 나는 오움이 문자로서의 표현보다는 소리로서의 표현이라 말하는 것이 더 옳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오움이라는 소리 자체가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소리라고 한다. 몸의 단련과 마음의 단련이 함께 가는 것도 우파니샤드에서의 진리 추구이다. 그럴 경우에 공부는 우리의 일상과 존재와 떨어질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마음이야 하늘과 바다를 휘저을 수 있겠지만 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화의 본질이 극단적인 남성화의 길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더더욱 우파니샤드에서의 몸과 마음에 대한 철학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세상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남성들의 궁색한 변명거리가 있는데, 바로 '남자의 욕망은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정신)은 이성의 노예이면서 몸은 욕망(감정)의 노예라는 극단적인 구분에 갇힌 남정네들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성에 대한 찬미로 들끓는 남자들이 몸은 이성으로도 통제가 안된다니!) 그들의 몸과 마음이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점점 더 따로 놀게 된다면 큰일이다, 큰일.

또 한가지 우파니샤드에서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것이 바로 미혹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야라고 하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마야는 인간으로 하여금 제한된 시각을 갖게 하고 모든 것을 각각 다르게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파니샤드는 '참 실재에 비추어보면 이 세상이 실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그에 따르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미혹이며 마야인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미혹의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그와 동시에 미혹 그 자체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 불안정하고 거짓인 실재를 통해서만이 영원하고 변함없는 브라흐만의 자리로 갈 수 있다.'고 말함으로 해서 미혹의 상태를 긍정하는 것이다. 무지, 무명의 상태를 깨닫는 것, 무지를 아는 것은 지혜만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와 같은 설명이 가능한 것은, 미혹이 불혹으로, 무지가 깨달음의 지혜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한다. 보리수나무 열매를 쪼개면서 보이지 않지만 볼수 없는 미세한 힘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큰 나무가 있음을 믿으라고 하는 일화(찬도기야)에서도 보여지듯이, 그리고 서양의 철학이 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면, 동양의 철학은 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민정씨의 말처럼 우파니샤드에서도 그러한 믿음이 중요한 작용을 한다.

아직은 아뜨만이 아니고, 심지어 아뜨만을 깨닫지조차 못했음에도, 우리가 빠져 있는 이 미혹의 세계를 오히려 디딤돌 삼아볼 수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무궁무진한 미혹의 세계에 머물러 있고 싶다. 그러면서 나의 몸에서 마음으로, 다시 마음에서 몸으로, 부단한 노력과 열정이 조금씩 물꼬를 트면서 오갈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개개인의 영성은 그와 같은 삶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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