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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평점 :
읽어보니 별 내용도 없는 외국인의 찌라시가 왜 이리 많이 팔릴까?
왠지 저항하는 것이 "있어" 보여서?
몇 쪽 되지 않는 글을 읽어 쉽고 만만하고 싸게, 세계의 지적 조류에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다면 그것은 시대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시류에 영합하는 것 아닌가?
아래는 함석헌 옹의 글이다.
우리의 위대한 사람,사상은 잊고 남들이 본다하니 우르르 몰려다니는가.
희망이 있다 해서 웃고 없다 해서 우는 사람, 한가한 사람 입니다. 정말 살자는 마음이면 현실을 보고 절망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려 애써 보다가 팽개치고 종살이라도 하며 살아가 보자 하는 놈 산 놈이 아닙니다. 반항하다가 죽더라도 종살이는 못하겠다 하는 놈이 정말 산 놈이요, 산 놈이기 때문에 죽어도 삽니다. 산 생명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희망은 그런 사람들과만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 자체 안에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다시 말하면 불멸의 생명을 믿어서만, 믿음 그 자체가 희망이요 생명이란 말입니다. 분재 재배자가 나무를 제 맘대로 심지만 분재의 주인은 그 분재자가 아니고 그 나무 자신입니다. 장에 새를 기르는 사람이 맘대로 기르고 노래를 가르치지만 새장의 주인은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이 나무에 있고 새에 있지, 그 기르는 놈에 있지 않습니다. 나라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지배자가 제 마음대로 씨알을 이리 끌고 저리 끌지만, 그 노릇을 하는 권리는 씨알에 있지 지배자에 있지 않습니다. 씨알이 지배자에 복종하니 그러지, 만일 죽기로 한하고 반항한다면 지배자 자신은 쌀을 한 톨 생산할 수도 실을 한 치 만들 수도 없습니다. 종살이 아니하는 권리는 씨알에게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현실을 바로 파악하나 못하나에 있습니다. 똑바로만 본다면, 나무는 분이 죽는 것임을 알 것이고, 새는 장이 죽는 곳임을 알 것이고, 씨알은 그 제도가 자기의 죽는 곳임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은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몸을 위한 것이지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몸을 생명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욕심을 그 몸에 쓰고 정신에 쓰지 않습니다. 그것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함석헌 - "끝나지 않은 강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