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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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아일랜드의 소설들은 일반적으로 영미 문학의 카테고리 안에 포함된다. 같은 영어권 소설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막상 읽어 보면 미국이나 영국에서 쓰인 소설들과는 다른 결이 느껴진다. 묘한 향기랄까? 아일랜드 특유의 문화가 장면이나 인물, 문장 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대문호인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에서 시작해서 메이브 빈치의 <체스트넛 스트리트> 아일랜드의 주목받는 젊은 작가인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까지 아일랜드 소설은 읽은 것은 적었지만 읽을 때마다 깊은 인상이 남고는 했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1980년대의 아일랜드의 농촌을 배경으로 하며 집안이 경제적으로 곤궁해진 한 소녀가 여름 동안 먼 친척에게 맡겨진다는 이야기다. 소녀를 돌봐주는 킨셀러 부부는 소녀를 소중하게 대해준다. 소녀에겐 이러한 애정을 처음 겪는 것이었다. 소녀의 친부모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자식들에게 애정을 쏟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소녀에게는 다른 형제, 자매들도 많았다. 소녀의 친부모에게 소녀는 그저 많은 자식 중 하나였을 따름이었다.

 

킨셀러 부부는 소녀를 사려 깊은 애정으로 돌보아 준다. 소녀는 깨끗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같이 시내로 장을 보러 나가기도 한다. 여름날의 추억으로 불릴 그런 시간 사이에서 소녀는 문득, 문득 위화감을 느끼기도 한다. 소녀가 쓰는 방의 원래 주인. 키우는 개를 외면하는 부부. 시내에 나갔을 때 그들을 보며 쑥덕거리는 사람들. 킨셀러 아저씨가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이 너무 많다.”라는 말을 한다. 이는 역자 후기에서도 다뤄지는 말이다. 타인은 너무나도 쉽게 타인의 비밀을 들춰내고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말하고는 한다.

여기서 알지 않아도 되는 것. 이라는 것은 그들이 지금 즐겁게 지내는 이 여름날의 날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소녀는 마지막에 친부모에게로 돌아가며 그 여름날이 자신의 일부를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사실을 킨셀러 부부에게 알리려 소녀는 마지막으로 달려간다.

 

이따금 소설은 일종의 알고리즘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떤 정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인물의 행동이나 이야기 특정, 문장, 단어까지 정교하게 조직된다. 그렇게 완성된 알고리즘은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안정성이 높지는 않다. 독자라는 소프트웨어가 소설이라는 알고리즘을 독해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정 부분 오류가 생겨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오류야말로 문학의 본질적인 기능 중 하나이다. <맡겨진 소녀>는 소설의 이러한 기능을 잘 활용한 소설이다. 모든 상황은 간접적으로 묘사되지만, 오히려 더 명료하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소녀의 불우한 가정, 킨셀러 부부의 비극, 소녀와 부부 사이의 애정은 직접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여백으로 보이기까지 하는데,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그 여백을 채워 넣게 하는 방식이다. 이런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 과정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추리소설을 읽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문학적인 요소가 가장 오락적인 요소로도 작동하는 것이다. 가끔 광고 문구에 천재작가라는 수식이 쓰일 때마다 두드러기가 나고는 했는데 이 작가의 경우에는 그런 수식이 주어질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맡겨진 소녀>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개봉에 맞춰서 한국에 출판된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로 화제가 될 수는 있었겠지만, 이 소설이 가진 힘이 어마어마하게 크기에 지금과 같은 화제가 되는 책이 되지 않았나 싶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금방 국내에 소개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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