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로의 초대
호르스트 푸어만 지음, 안인희 옮김 / 이마고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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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1980년 처음 출판된 이후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단순한 소설이라고 보긴 힘든, 아니 오히려 그의 글 대다수가 그렇듯 난해함으로 무장한 이 책이 그토록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정통한 대답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책이 중세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암흑의 시대로 이야기되고 있는 중세는 지금까지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끈질긴 생명력만큼 우리가 중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진 못하다. 르네상스를 앞두고 있는 그 시대가 지독히 신 중심적이었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이 책은 그러한 시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단순히 그리워하는 것을 뛰어넘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생각을 위해 쓰여진 책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꽤나 두꺼운 분량을 할애해 적어나간 이야기들은 실로 자세하고 또 흥미로웠다.

현대처럼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중세의 사람들은 길어야 30여 년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읽으면서 중세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행운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암묵적으로 행해지던 여아 살해를 통한 성비 조절 부분을 읽으면서 남성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은 마음에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는 여성을 제 2의 성으로 취급하는 교회가 중심에 놓인 사회로서는 당연한 처사였을 텐데도 말이다. 하지만 이는 오늘날의 사회가 중세로부터 꽤 많은 부분을 이어받았음을 증명해 보이는 극히 작은 부분에 해당한다. 근대적 의미의 유치원과는 다소 차이가 있긴 했으나, 중세의 어린이들은 일정 정도 나이가 되면 교회에 봉헌되었다. 그곳에서의 삶은 어린 아이가 견디기에는 엄격했으나, 자신의 삶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신을 향한 경건함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이들이 일상적인 굶주림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부모들이 선호했던 방식인 듯 싶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웠던 것은 권력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물론 중세의 권력은 교황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권력은 황제권의 적지 않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성스러움으로 인하여 보호될 수 있었다. 물론 교황 역시 한 개인으로서 죽음 이후에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지만, 교황이라는 그들의 직위는 그들의 범죄조차도 용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에게 성스러움을 부과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성스러움도 결국은 지상에서의 권력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었기 때문에, 몇몇 교황들은 전임자 살해의 의욕을 짊어진 것을 보면, 교황의 선출을 놓고는 적지 않은 갈등이 존재했던 듯 하다. 위조와 관련된 부분 역시 흥미롭다. 많은 위조들이 성직자들에 의해 행해졌으며, 이는 신의 영예로움을 찬양하기 위해 행해졌기에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행해진 위조는 중세와 관련된 기록의 2/3를 차지할 정도라고 하니, 위조를 통해서라도 신의 완벽성을 찬양하려 들던 중세 인들의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할만하다.

너무 광범위한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뒷부분으로 갈수록 지루해지는 감도 없진 않다. 하지만 1000년 가량 지속된 중세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를 이해하는 것과 동떨어진 작업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중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경제적 풍요와 물질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공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과 강렬한 경쟁에 익숙해져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더 이상 질문치 않는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비즈니스이지만 당시(=중세)의 삶은 존재였다.라는 부르크하르트의 말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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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쾌락
장 베르동 지음, 이병욱 옮김 / 이학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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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적, 기독교적 질서에 기반한 금욕 사회 그리고 심심찮게 출몰했던 각종 질병과의 싸움. 중세를 상상하는 것은 지독히도 재미없는 과정이다. 현재의 시점에 서서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해석하는 것의 폐해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세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상상치 못할 것이다. 그 시대에는 어떤 즐거움도 존재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이들이 어두운 표정을 하고 살아갔을 것이며, 봉건적 굴레에 꿰여 괴로워했으리라는 지레 짐작만을 할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활했다는 점에서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이 괴로움이 있는 만큼 즐거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쾌락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리라. 중세의 쾌락이라는 주제는 다소 주목 받지 못했던 측면이 있다. 쾌락이라고 하는 것이 중세의 이미지와 전혀 걸맞지 않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일상 생활을 돌아볼 수 있는 사료를 찾아보는 게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이 책 한 권을 저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리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한 진리가 아닐까 싶다.

책은 크게 중세의 쾌락에 대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중세의 금욕적인 분위기는 실로 대단했다.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결합은 아이를 갖기 위함에 한해서만 허락되었으며 그 기간 역시도 짧았다. 이러한 것들을 어기는 행위에 대해서는 금식, 고행 등의 형벌이 까다롭게 적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가정이라고 하는 다소 사적인 영역에 그 모든 규칙들이 정말로 엄격하게 적용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동시에 중세의 이러한 모습들은 다소 완화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고 비정상에 대해서는 차별하고 처벌하는 오늘날의 사회 모습과도 유사한 면에 존재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분 짓기에는 역시나 교회가 앞장섰다. 성직자들은 각종 저서를 통해 금지 사항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직자들은 일반인들에게는 금기시했던 동성애에 앞장서기도 했다. 권력을 앞세워 스스로 금지한 행위를 즐기는, 이는 각종 부정 부패에 연루된 고위 공직자들을 찾는 것이 쉬운 오늘날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면모라 하겠다.

3부 여러 가지 쾌락 부분을 읽으면서 금욕이라는 단어는 중세 사회를 설명하는데 다소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듯 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식탁 하나 가득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들과 온갖 귀족들이 모여 흥청망청 놀아대는 화려한 향연을 두고 금욕을 논하는 것은 다소 우스운 일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금욕에 어울리는 듯한 정신적인 즐거움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독서나 글쓰기 등 역시도 왕이나 귀족 등 권력을 지닌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책을 읽는 것보다는 구절보다 흥미로운 글을 양피지에 베껴 쓰고 세밀화로 장식하는 것, 보다 많은 장서를 소장하는 것에 몰두한 듯한 그들의 모습은 봉건 지주에 얽매여 생계를 꾸려나가기 바쁜 이들에게는 허락될 수 없는 행위에 불과했다.

전반적으로 쾌락이라기 보다는 타락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사회가 중세인 듯 했다. 각종 규제를 통해 생활 전반을 억압했지만 그 틈새를 뚫고 곳곳에서 비행들이 자행되었다. 동시에 거침없는 낭비와 풍요로움의 증거로도 볼 수 있을 듯한 향연 역시도 금욕보다는 차라리 타락이라는 말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자료의 선별적 생존으로 인하여 다소 권력층의 생활상이 집중 조명된 듯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소위 서민층들은 어떤 생활을 영위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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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문명의 수수께끼
요시무라 사쿠지 지음, 김석희 옮김 / 프레스21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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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일반인들이 가질 수 있는 역사의 현장에 대한 관심들을 자극시키고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땐 도무지 어떠한 용도로 사용했을지 알 길이 없는 물건들에서부터 시작하여, 굉장히 발달한 문명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역사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문명들에 이르기까지, 세계 전역에 걸쳐있는 역사의 현장을 책 한 권으로 훑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언론을 통해 몇 차례 부각되어 온 나스카 평원의 거대한 지상 그림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대의 주술적 신앙을 엿볼 수 있는 풍만한 모습의 여성 조각상, 그 당시의 생활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동굴의 벽화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발달을 이루었지만 생산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점점 더 각박한 마음을 지닐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문화 유산들은 일종의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많은 문화 유산들로부터 마음의 평안, 여유 등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몇몇 유산들은 현실의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인해 보존되지 못하고 심지어 의도적으로 파괴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유적의 경우, 탈레반 정권의 참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듯 했다.

책의 중간중간 엿볼 수 있는 유적들의 사진은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사진에서도 멋지고 웅장함이 느껴지는데 실제로 그 앞에 선다면 어떠한 기분이 들지, 나의 기대감이 증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책의 제목이 불러일으키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에는 무언가 많이 부족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엄청난 기대감을 가지고 추리 소설의 첫 장을 펼쳤으나, 그 구성이 너무도 허술해 한숨을 푹푹 쉬는 꼴이라고 해야 될까. 너무도 단편적인 내용으로 단지 1-2장 정도의 분량으로 세계사적 문화 유산을 모두 다루려 든 점은 작가의 욕심이 너무도 지나친 듯 느껴졌다.

또한, 문화 유산을 다룸에 있어서의 공정성이랄까. 물론 어느 나라의 문화재이기에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본 작가의 눈에 우리 나라의 문화재는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은 듯 하다. 가야가 일본의 뿌리는 아니었을까 라고 조심스레 던지는 그의 문제제기는, 고대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보다 자세한 고찰 없이는 피상적인 문제제기에 머무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발해가 백두산의 폭발로 인해 멸망하지는 않았을까 라는 점 역시도 너무 단편적인 의문제기로 느껴진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는 백두산과는 멀리 떨어져있으며, 설령 백두산이 폭발하여 주변 지역이 모두 초토화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지역이 발해의 중심적인 지역이 아닌 만큼 그것이 발해 왕국 전체의 몰락을 가져올 정도였을까 싶다.

과거는 하나의 진실을 담고 있지만, 그 진실은 후대에 해석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양면성을 지니기도 한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아직까지 하나의 의문점으로 남아있는, 검증되지 않은 역사인 것이 많다. 어떠한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문명은 위대한 것이 될 수도 있으며 초라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미래 지향적이라고 하지만, 나는 인류의 과거에 대한 고찰이 현 인류의 정당성 확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며, 각 국가의 국가경쟁력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기를 쓰고 지난 식민 역사를 부정하는 것, 없는 역사, 문화재까지 양산해가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찾고자 하는 것 모두가 이러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이 책을 읽는 것이 세계의 신비한 문화 유산들 만큼이나 우리의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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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의 향연 - 컬리지언총서 22
마샬 버먼 지음, 문명식 옮김 / 이후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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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혁명시도의 실패이후, 계속적으로 맑시즘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일부는 맑시즘 안에서의 대안들을 찾으려 노력하기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현실사회가 너무도 많이 변화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더 이상 우리 사회에 적용시킬 수 없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맑스의 논의가 우리 사회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함을, 계급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다지 필요치 않다는 식의 논쟁도 일어났었다. 그렇지만 저자는 여전히 맑스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맑스에 대해, 그의 사상에 대해 손을 뻗힌다. 그것은 단순히 예전에 사회를 이끌던 하나의 이론이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고찰할 만큼의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회의 많은 변천에도 불구하고 100여년전에 맑스가 이야기한 것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한 틀을 이루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자 아버지의 불행했던 삶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한 서점에서 구했던 맑스의 초기 저작에서 저자는 맑스주의 휴머니즘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준 맑시즘에 대한 경험들과 함께 어우러져, 그로 하여금 평생에 걸쳐 맑시즘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지난 날의 사회주의 혁명에서 보여준, 민중에 대한 또 다른 의미의 수탈과 착취. 사람들은 그러한 겉모습이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뛰어난 이유로 꼽았고, 맑시즘이 내포할 수 밖에 없는 본연의 내적 모순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맑스가 이야기 한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지난 날의 그릇된 사회 모습에 어떠한 질문도 던지지 못한체, 그저 맑스의 사상을 부정하기에 바뻤던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맑스의 사상은 죽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자행되는 자본에 의한 노동자 수탈이 끝날 때 까지 죽을 수 없다. 여전히 그의 사상은, 자본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노동력을 팔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지속되어야만 한다. 비록 노동의 유형이 직접적인 몸을 파는 행위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사무실에 앉아 무언가를 관리하는 행위로 나타나 혹자는 그것을 '신쁘띠부르조아지'라고 부를지라도...

자본은 자애로울 수 없었다. 기계를 놀게 하면 그마만큼의 손해가 나고 공장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을 들어 수많은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그리고 지난 날 그 '노동자'라 불리우는 범주 안에는 희망의 덤불 안에서 끝없이 웃고 뛰놀아야 할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에겐, 그러한 부당함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못한 죄가 있다. 아니, 우리는 그러한 일자리가 있음에 감사하고, 그러한 노동을 함을 행복해 하는 일종의 '허위의식'마저도 있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은 맑시즘의 등장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은, 맑스주의를 필요로 하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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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지음, 이희재 옮김 / 김영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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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께에 놀라고, 내용에 다시 한번 놀란다. 국가라는 하나의 경계선이 사라지고, 이제는 문명이 그 경계를 구분짓는 기준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끄덕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무언가 신선해 보이고, 학계에 놀란을 불러 일으킬만 하다는 느낌을 받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두께가 두꺼워서 읽는데 내 집중력이 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작가가 일부러 그렇게 염두하고 글을 쓴 것일까? 이슬람과 관련된 부분만 가면 왠지 모르게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세계 분쟁에 있어서 이슬람이 그 주축 세력이 된 비율이 굉장히 높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들이 사용한 방식 중에는 테러, 핵과 관련된 것들 등이 많다는, 그것은 이슬람 10-20대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관련이 있다는... 그다지 많은 지식을 가지지 못한 나이지만, 그 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이슬람 민족 전체가 테러 유전자를 본질적으로 타고 났고, 국제분쟁을 일으킴에 있어서 작은 규모가 아닌 집단적인 테러 등을 더 선호한다는 식으로 여겨졌다. 왜 그들이 그러한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지, 지금까지 미국 등 서방과 이슬람 세계가 맺어온 관계 등에 대한 고려가 많이 부족한 듯 싶었다.

왜 그들이 그러한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저항할 수 밖에 없었는지,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의 어떠한 정책이 그들에게 그러한 반응을 불러 일으킨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는 듯 하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이슬람은 호전적이고, 폭력을 좋아한다 라는 식의 부적절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이론 자체는 참 획기적이다. 왜 지난 9.11 테러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가졌는지 짐작이 갈 정도로, 각 문화에 대해서 깊이있는 고찰을 꿰하고 있었다. 다만, 자신이 속한 서구 세계에 대한 우월적인 사고는 아무래도 알게 모르게 표출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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