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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위너와 루저 분류기가 존재한다면 철수는 루저란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농담처럼 가볍게 쓰이는 단어 ‘루저’. 하지만 그 단어는 분명 모욕적이고 잔인하다.
그리고 미드나 영화에서 이 단어가 나오면 으레 다툼이 벌어지거나 강도 높은 범죄가
일어나기도 한다. 루저는 함부로 사용하기에는 분명 위험한 단어였다.
그런 무서운 단어인 ‘루저’, 그런데 왜 철수는 루저로 불리어야 하는가?
단지 현재 취업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라는 동안 뚜렷한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근거로, 연애사가 꽤나 꼬였었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루저’라고 부를만한 충분한 사유가 마련되었다는 것일까?
그 충분한 사유는 누가 정한 것일까? 그 사유가 철수에게도 적용되는 것일까?
루저 판단 기준을 철수에게 엄격하게 들이대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을 내리는 듯한 소설이었다. 우선 너무나도 당연하게 철수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에게 꼭 맞는, 그에게만 적절한 사용설명서를 꼼꼼하게 작성하고
있다. 그가 타인으로부터 오해를 사게 만들었던 여러 가지 상황들이나 특성들에 대해
그동안 누군도 들어주지 않았던 사유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 낱장의 사유설명서들은 자연스럽게 철수사용설명서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철수가 고장났다고, 제품에 원시적인 하자가 존재한다고 당황하며 반품이나 환불을
요구하기 전에 우선 철수 사용 설명서를 정독하도록 하자. 반품이나 환불은 그 다음으로
미루어도 크게 늦지만은 않을 것이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통해서 그 모든 불편함이
오해나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사용 설명서를 읽지 않은 잘못을 제품의 하자로 판단해버리는 건 제품 입장에서 너무나
억울한 일이지 않을까? 철수 역시 그와 똑같은 이유로 억울함을 느끼고 있다.
이전까지 타인의 평가를 스스로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그 억울함에는 씁쓸하고
우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사용 설명서가, 철수에게 꼭 맞는 사용설명서가 필요하다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사용설명서를 주의깊게 읽어 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용설명서를 가장 먼저 숙지를 해야 할 인물이
누구인가를 마침내 눈치채게 된다.
이 소설을 즐겁게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즐겁게 읽기에는 철수가 그동안
쌓아 온 매일의 경험이 유쾌하고 밝지만은 않으니까. 오히려 우중충하고 회색빛이다.
게다가 읽는 사람이 우울해질 정도는 아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읽을 수 없게
만드는 불편함이 이 소설에는 존재한다. 하지만 실소도 조심스럽게 만드는
그 불편함으로 인해서 이제까지 별로 신경쓰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던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