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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오래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사랑이 없었더라면 지금 존재하고 있는 소설의 얼마 즈음에 흔적도 남김없이 사라져버릴까.
그럴 생각이 들었을만큼 소설에서 사랑은 주제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소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오래 오래’라는 소설은 그야말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참 오래 오래 사랑한 두 남녀의 이야기. 두 사람은 수십년 동안 서로에 대한 마음이 변치
않았고, 둘 사이에는 명석하고 잘생긴 아들도 있었다. 남자는 항상 그 여자를 생각했다.
그녀를 기다려주었고, 또 기다려주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형태의 사랑을 한 사람에게
바치고 있었다.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랑이 찾아올 즈음에 이미 그들 각자의 옆에는 인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던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다. 그들이 처음 만나던 그 순간 남자는
결혼생활의 고비라고 할 수 있는 7년 차를 3년 정도 지나고 있던 참이었다. 남자의 아버지는
남자가 결혼하기 바로 직전에 자신에게 세 명의 여자가 있었음을 고백했다. 아버지는
그런 연애 가족력에 대해 남자에게 언질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순간 남자는
자신한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아버지와는 다르다고...하지만 결혼의 고비인 7년 차도
무사히 지나가고, 그 이후로도 3년이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 여인을, 운명의 여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를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 그 남자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 그처럼 사랑에 빠졌음을 스스로가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세상은 훨씬 단순하고
평온해질텐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남자는 그녀에 대한 사랑을 또렷하게 느낀다.
그녀는 그 자리에 두 명의 아이와 함께 나온 길이었다. 아이들이 있고, 남편이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고 게다가 스스로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아내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자각은 그의 사랑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래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실제로
그날로 아내에게서 떠나온다. 인상적인 것은 무척이나 쿨하게 그 이별을 아내가 받아들였
다는 것. 이런 주제가 드라마에서 나오면 대체로 아내는 격분하거나 울음을 터트리는 게
거의 대다수이지 않던가.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그를 너무나 잘 알고있는
그녀는 오히려 행운을 빌어준다. 자세한 설명이나 묘사가 없는 아주 짧은 그 장면이
이렇게 강인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어떤 이유인지
그 장면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남편을 보내주는 아내의 모습 말이다. 창 밖으로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남편에게 던지는 그 몇 개의 문장이 말이다. 오래 오래 사랑했던 그 커플들의
애정 행각보다 더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 그는 아내는 떠났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사랑이 시작되려고 한다. 그야말로 오랜
기간의 사랑이 형태를 잡아가려 한다. 그는 아내를 떠났고, 그녀에게 모든 것을 걸었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도, 아이들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도 놓을 수
없었나보다. 그렇게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지속된다. 아이를 가지고 출산도 한다. 그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외적으로 여자 남편의 아이로 성장한다. 그 아이가 태어나는 날 병원
건너편 건물에서 초조하고 불안하게 그 여자의 병실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안타깝다.
불쌍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후로 오랫동안 그는 아이에 대해서 물어볼 수 없었고, 그녀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되느냐고? 그에게는 오랜 기다림이라는
게 할당되어 있었고, 그 할당 부분을 묵묵하게 참고 견딘다. 그녀를 내 아내라고 부를 수
있는 순간이 오기까지. 어찌되었든 그들의 사랑은 오래오래 지속된다. 남자는 여자를
떠나지 않았고, 여자는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 남자가 마련해 둔 그녀의 자리로 걸어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랫동안 사랑했다. 이건 그들의 그런 사랑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