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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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녀를 알게된건 <어스시의 마법사> 때문이었다. 원체 고전문학과 친하지 않은 탓에 그녀의 작품들을 만나볼 기회가 없었지만, 우연히 만났던 작품 덕분에 그녀를 기억할 수 있었다. 판타지 문학의 3대 걸작으로 손꼽힌다는 <어스시의 마법사> 이후 만난 그녀의 작품은 강연을 위해 쓴 글, 에세이, 서평, '헤지브룩'에서의 일주일간의 기록 등 다양한 그녀만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묶은 에세이집이었다. 최근 집안에 큰 일이 있었고, 그로인해 몸도 마음도 정신도 지치고 힘들었기에 한동안 독서는 생각도 못하던 시기였다. 그러다 한켠에 놓아두었던 이 책이 문득 눈에 들어왔고, 조금씩 읽어보기 시작했다. 아이들 재우면서 한 편, 집안일 하다 쉬면서 또 한 편. 그렇게 짬날 때마다 읽었고, 그 시간은 내게 생각보다 큰 힐링의 시간이 되어주었다. 생각거리를 던져주기도 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 어떤 에세이집보다 특별한 에세이집을 만난 기분이었다. 특히 그녀의 서평들은 고전문학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나도 한번쯤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검색을 해보니 대부분 우리나라에 출간이 되지 않아서 조금 아쉽기도 했다.


나는 시나 소설을 읽을 때처럼 즐겁게 논픽션을 읽는 일이 별로 없다. 잘 쓴 에세이에 감탄은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보다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 더 좋고, 그 생각이 추상적일수록 이해를 못한다. 내 머릿속에서 철학은 우화로만 서식하고, 논리는 아예 들어오질 않는다.  - P. 9 이 책은 서문의 첫 문장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어?! 나도 이야기를 따라가는게 좋은데! 너무 추상적이면 이해가 잘 안되던데! 나랑 비슷하다!!' 라며 말이다. 대작가와 아주 조금은 비슷한 면이 있구나 싶어서 내심 더 이 책에 눈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의 성차 문제는 괴로운 상태로 남아 있다. 여성들이 쓴 책은 계속 차별당하거나 소외당하며, "중요한" 문학상은 더 적게 받고, 작가가 죽고 나면 부주의하게 다뤄지는 일이 더 많다. "여성의 글"에 대해서는 들어도 "남성의 글"에 대해 듣지 못하는 상황, 즉 남성의 글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한 균형은 맞지 않는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흔히 쓰면서 자연히 따라와야 마땅할 반대말인 매스큘리니즘은 아예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동일한 특권과 편견이 반영되어 있다. 둘 다 필요 없어질 날을 간절히 바란다. - P. 19 생각해보면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참 많이 들었어도 매스큘리니즘이라는 단어는 거의 들어보질 못했다. 세상은 여전히 여러가지 면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존재한다. 많이 나아졌고,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런 부분을 또 한번 느끼게 되면 씁쓸해지는건 어쩔 도리가 없다. 두 단어 모두 필요없어지는 그 날은 언제쯤 오게 될까?


상상력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에요. 이윤 추구의 어휘들에 상상력이 낄 자리는 없습니다. 상상력은 무기가 아닙니다. 모든 무기가 상상력에서 비롯하고, 무기의 사용이든 비사용이든 상상력에 달려 있으며 다른 모든 도구도 마찬가지지만 말입니다. 상상력은 정신의 필수 도구이며 생각의 본질적인 방식, 사람이 되고 사람으로 남기 위해 꼭 필요한 수단입니다.  - P. 22


장르 개념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 장르에 따라 판단하는 건 더더욱 어리석고 유해해요.  - P. 33


세상엔 많은 나쁜 책들이 있지요. 나쁜 장르는 없어요.  - P. 39


단편소설 하나를 잘 읽으려면 그 글을 따라가고, 행동하고, 느끼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실상 그 글을 쓰는 것만 빼고 다 해야 한다. 읽기는 게임처럼 규칙이나 선택지로 '상호작용' 하지 않는다. 읽기는 작가의 정신과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작업이다. 모두가 빠져들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 P. 133


읽는 내내 그녀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좋았고, 감탄이 나왔다. 사이다 같은 문장들이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고, 책에 대한 그녀만의 확고한 생각, 신념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비록 단 한번 만나본 그녀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생각이 담긴 이 에세이집은 그녀의 소설보다 만족감이 더 컸다. 언젠가 고전문학과 친해질 시기가 온다면, 그때는 그녀의 작품들을 제대로 다시 한번 만나봐야겠다. 그녀의 서평 속에서 만난 작품들도.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출간이 되어야겠지만 말이다.) 뜻밖의 선물과도 같은 에세이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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