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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무게
크리스티앙 게-폴리캥 지음, 홍은주 옮김 / 엘리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10년도 전에 떠난 고향을 찾은 나. 도착하자마자 두 다리가 으스러지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정전사태로 기능이 마비가 되어버린 마을에서 그를 치료해줄 수 있는 의사는 수의사 뿐이었고, 그는 수의사의 도움으로 두 다리를 수술했다. 아버지를 찾고자 했지만, 그가 도착하기 얼마 전에 이미 돌아가신 후였고 이 소식은 그가 사고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마을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알게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의 친인척들은 여전히 마을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 몇일은 마을 사람들도, 삼촌과 외숙모들도 그를 자주 찾아왔고 돌봐주는 듯 했다. 하지만 마을의 상황은 여유롭지 못했고, 마을 사람들에게 나는 짐에 불과한 존재였다. 오랫동안 이어진 정전으로 절반에 가까운 마을 사람들이 벌써 이탈을 했고, 남은 사람들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전기가 다시 들어와도 원상회복은 되지 않을 거야. 알아? 정전되면서 이전의 삶은 전부 훼손됐어. 그나마 도시보다는 형편이 좀 낫다지만 그래도 쉽진 않지. 처음엔 다들 서로 도왔어. 시간이 흐르자 패닉을 일으키는 사람들,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겼어. 사태를 이용하려고 드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금은 안정을 되찾았어. 우린 식료품을 배급하고 순찰을 돌아. 하지만 긴장을 풀어선 안돼. 아주 작은 사건 하나가 모든 걸 뒤집을 수 있으니까. - P. 33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상자인 나를 마을 사람들은 외부인이자 언덕 위 빈집에 머무는 노인 마티아스에게 맡기기로 한다. 보급품을 지급해주는 조건으로. 마티아스는 정말 운이 나쁘게도 어쩌다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인물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 곁으로 가기 위해 도시로 향하던 중 자동차 고장으로 정비공을 찾아 이 마을에 들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비공은 사망한 뒤였고, 정전 사태로 발이 묶여버렸다. 금방 해결될 줄 알았던 정전은 지금껏 해결되지 않았고, 도시로 돌아갈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마을의 빈집에 머물고 있는 이였다. 마을의 자경단원들은 마티아스에게 나를 맡아주는 대신 보급품 지급과 함께 조직 예정 중인 도시 원정대에 한 자리를 마련해주기로 한다. 그렇게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하는 노인과 노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젊은이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나의 입장에서는 매 시간 불안할 수밖에 없었고, 누구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그는 당장이라도 버려질 수 있는 존재나 다름없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아내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던 마티아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을 터였다. 도시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도 부족할 시간에 중환자를 돌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자경단원들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던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이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잊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마을을 덮친 정전, 눈, 고립은 다툼, 의심, 고뇌를 불러왔고 이내 약탈, 이탈, 외면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뭉치는게 아니라 흩어졌고, 각자의 생존 앞에 타인의 생존은 더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중환자에 가까운 부상자와 외부인을 그 누가 신경쓰겠는가.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와 마티아스의 심리상태는 불안 그 자체였다. 서로를 믿지 못하면서도 의지해야 하는 두 남자의 미묘한 신경전은 보는 내내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다. 마을의 상황 역시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조마조마 했다. 대부분의 편의시설이 전기로 인해 돌아가는 지금의 세상에서 전기가 사라진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나와 마티아스의 모습 덕분에 착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고갔다. 언젠가 우리가 만들어낸 편리함이 우리를 다시 불편함 속으로 밀어넣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은 벌어져서는 안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