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그림이다 - 동서양 미술의 완전한 만남
손철주.이주은 지음 / 이봄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술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어려운 취미다. 막연히 그림 보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흰 것은 바탕이요, 색 있으면 그림이라. 동양화를 보면 더 사무치게 느껴지는 이 무지함. 사 놓고 안 읽은 그림 관련 책도 꽤 있다. <서양미술사>,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이런 책들을 사 놓고 안 읽었다. 다른 책의 저자들이 '좋은 책'이다 하여 욕심을 내서 샀는데, 도통 손이 안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림에 대한 열망보다 그림에 대해 아는 척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 것은 아닌가 조금 찔리기도 하다. 역시 마음의 준비가 덜 된 탓이다. 역시 나는 미술하고는 거리가 있어, 그림은 무슨이라고 투덜대며 지쳐갈 무렵 우연히 이 책이 손에 들어왔다.

 

먼저 형식이 마음에 든다. 동양 미술과 서양 미술에 조예가 깊은 두 저자가 대화를 하듯 주제를 놓고 풀어나가는 방식이 신선하다. 그냥 미술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지루할테지만 간간히 두 저자에 신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귀가 쫑긋해진다. 사람 냄새가 나는 미술책이라고나 할까. 우리와 그림을 이어주는 두 사람에게 독자는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어떤 분들이기에라고 하며.

어린 시절 달력에 그려진 신윤복 그림이 기억난다. 비록 집에 그림 한장 액자로 걸려있지 않았지만 액자에 걸려야 그림인가? 달력에 그려져 충실하고 친절하게 오늘이 몇 일인지도 날짜와 요일도 보여주며 안방 한 켠을 멋지게 장식하던 우리 그림. 요즘도 우리네의 해학과 정서가 담긴 이런 달력이 나오는지 무척 궁금하고 가능하면 구해서 걸어 놓고 싶다. 주로 은행에서 이런 달력을 주는 듯 한데... 하다못해 잡지에서라도 오려서 집에 그림을 붙여 둘 일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냥 그림 좋다에서 한 발자국 나가고 싶었는데 이 책이 그 견인차 역할을 해줄 것 같다.

 

그림이 아름답기만 하면 장식품이겠지. 많은 사연과 시대상과 생각할 거리를 전해준다. 인생에 대해 우리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그림들. 아름다운 그림과 멋진 해설이 어우러져 있다. 좀 더 여유가 생기면 그림 감상하기 강좌도 듣고 싶다. 그림 한 장에서 이렇게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할 수 있다니.

조선 초상화의 우수성에 대해서 알게된 것도 큰 기쁨이다. 아무리 서양 것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 해도 역시 우리는 자랑할 만한 역사와 문화를 가졌다는 자부심. 그림을 통해서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역시 그림에 대한 책을 읽기 잘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레첼에 '작은 보상'이라는 의미가 있고 역사가 제법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책에 나온 프레첼 그림을 보여주니 아이들이 좋아한다. 이렇게라도 해서 어릴 때부터 명화 감상시켜야지. 두 작가의 필력도 좋아서 글 자체도 무척 훌륭하다. 이렇게 좋은 책을 이 가을에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다. 기존의 딱딱한 형식에서 벗어나 즐겁고 유쾌하게 동서양을 넘나든 그림 여행을 시켜주는 책이다. 앞으로도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나 같은 미술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고 감상 수준 높지 않은 사람도 그림을 즐길 수 있도록.

 

< 인상깊은 대목 >

p.66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인들은 편지를 쓸 때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꽃이나 풀을 말려 편지지에 붙이곤 했는데요. 편지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라도 집집마다 꽃말사전 하나쯤은 기본으로 있어야 했다고 합니다.

p.67 그림 속에서 과일을 팔거나 과일바구니를 안고 있는 사람은 농염한 성적 유혹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p.94 예부터 이런 포즈를 일컬어 '백안간타세상인'이라 했습니다. '시답잖은 눈빛으로 세상 사람들을 본다'는 뜻입니다.

p.96 한때의 성공과 성취가 평생의 안락을 보전해주는 것이 아니듯 기나긴 좌절과 쇠락일망정 깨어있는 정신에 좀먹을 일은 없습니다.

p.105 눈을 잘 보세요. 놀랍게다, 시선이 엇나가는 사시입니다. 결점이랄수도 있는데 덮어주질 않았어요. 번암이 화가에게 몇 푼 쥐어줄 위인도 아니지만 뒷돈 받았다고 못난이를 잘난 이로 바꿔줄 이명기도 아니었겠지요. 한마디로, 찧고 까부는 붓질이 우리 초상화에는 없습니다.

p.106 조선 초상화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허접한 국수주의가 아니라 검증해본 미술사가들이 자부하는 바입니다. 초상화가는 '한 올 한 가닥조차 다르면 결코 그 사람이라 할 수 없다'는 모토를 내세웁니다.

p.108 단원이 글씨 오른쪽에 호리병 모양의 도장을 찍었는데, '빙심'이라 새겨져있습니다.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 옥병에 들어있다네'라는 시구에서 따온 말인 즉, 세상이 어떻든 누가 뭐라 하든 단단하고 맑은 심지는 변치 않는다는 뜻이랍니다.

p.119 <자기만의 방>(1929)은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던 버지니아의 강연을 정리한 저서인데, 그 책에서 그녀는 형이상학적인 언술대신, "여자가 소설을 쓰려면 연간 500파운드의 소득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지요"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영혼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돈과, 아이나 남편이 시야를 가리지 않는 독립된 방이 있어야 누구라도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p.141 자기 보존적이면서 성애적인 것이 합해진 삶에의 본능을 에로스라고 하고, 자기 파괴적이면서 궁극적인 소멸로 치닫는 충동을 타나토스라고 합니다.

p.144 "이제 모든 게 쉬워졌군. 이렇게 쉬운 건지 왜 몰랐을까." 헤밍웨이가 쓴 저 유명한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대사이지요.

p.153 행복은 바랄 바를 바라는 겁니다. 바라되 분수껏 바라면 행복은 자기 마음의 작용이라 언제든 얻을 수 있지요.

p.162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 프레첼이 고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보이네요. 프레첼의 어원은 '작은 보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 놓은 이 빵들은 빵집 남자가 거든 뿌듯한 대가겠지요.

p.165 더 부러운 것은 부인 스스로 행복하다는 확신이 있다는 점이예요. 찌든 가난으로 엄마 혼자 고생한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미워했던 큰 아들에게 부인은 "엄마는 부자로 살려고 결혼한 게 아니야. 행복하게 살려고 결혼했지" 하고 말했다지요.

p.199 진사는 비싸서 포도나 모란꽃 문양 등이 있는 도자기 일부에 살짝 칠하고 마는데 이 연적은 된통 다 발랐습니다. 그래서 귀티가 납니다.

p.101 취미는 재미삼아 하는 짓입니다. 그러니 남들이 콩팔칠팔할 수 없지요.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동냥자루도 제 맛에 찬다'고 할까요. 개살구도 맛들일 탓입니다. '악취미'란 말도 있듯이 취향은 천차만별입니다.

p.204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이 산문에 쓰기를 '취미나 멋은 군것질에 지나지 않는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고 했어요. 좀 뜨악한 말인데, 아마 취미와 멋이 지나친 것을 경계하려 했겠죠. 취미가 편향된 쪽으로 굳어버린 것을 두고 '기벽'이라 하지요.

p.206 청년은 열정 때문에 취미를 바꾸고 노년은 습관 때문에 취미를 간직한다지요. 나이 들수록 취미가 완강해집니다.

p.215 "악보가 왜 이리 허술해요?"하고 여쭈어보니, "이건 연주자의 좋은 취향에 의존하는 곡이에요. 느낌으로 연주하라고 그렇게만 제시한 거예요"

p.231 메뚜기는 한철이고 열흘 붉은 꽃도 없습니다.

p.237 그 시절에 돈 후안을 만난다는 건, 그의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이 아니라 일종의 통과의례라는 거예요. 심장에 시커면 피멍이 드는 비싼 대가를 치룬 덕분에 얻게 된 깨달음이라고 할까요.

p.242 '얼마나 따분한가, 멈춰서는 것, 끝대는 것, 닳지 않고 녹스는 것, 사용하지 않아 빛을 내지 못하는 것은." - 테니슨

p.249 이 그림의 모델은 화가의 가족이라고 하네요. 신한평은 이남일녀를 두었는데, 신윤복이 장남이었죠. 그렇다면? 저 찔찔 우는 아이가 신윤복 아닙니까. 지금 우리는 한 천재화가의 숨기고픈 신상을 털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