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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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도 아니고 시도 아니고 철학적 시 읽기라니. 그리고 즐겁다고?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목차를 보는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 '정말 재미있겠는데?'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 책은 정말 재미있게 잘 읽힌다. 철학자와 시인이 다른 글로 같은 주제를 이야기 한다. 시인은 시로써 철학자는 자신의 철학적 이론을 펼치면 우리를 생각지고 못한 낯선 지식의 세계로 이끈다. 이 낯설게 하기의 즐거움을 아는 순간 인생의 재미가 하나 더해진다. 현대인이 돈이 생기면 가장 하고 싶어하는 것이 여행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낯설지만 흥미로운 도시로 시인 한명, 그리고 철학자 한명과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더군다나 철학자는 대부분 외국인이다. 더욱더 낯설어 진다. 하지만 즐거움을 더 커진다. 한편으로 슬픈 일이기도 하다. 외국의 철학자들에게 여행 안내를 받는다는 사실이 말이다.

얼마전 읽은 김연수의 산문집 <여행할 권리>에서 작가는 왜 이상이 도쿄에 가서 죽었는지 의문을 풀고 싶어 이상이 머물던 곳을 찾아간다. 하지만 글을 다 읽어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작가가 해답을 찾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18장에 나오는 '리오타르와 이상'은 확실하게 말한다. 속이 다 시원할 정도로.
"이상이 동경으로 가고 싶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곳은 식민지 본국의 중심, 즉 산업 자본주의의 메카라고 상상되었던 곳이니까요."
식민시대였지만 대표적인 모던보이였던 이상은 새로움에 대한 강박증을 가지고 있었다. 도쿄에 간 이상은 이내 실망을 하고 다시 파리 혹은 뉴욕을 꿈꾼다. 비록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예전에는 시를 자주 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시에 한 발 더 다가선 기분이다. 시가 이토록 철학과 밀월관계였다니.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빠스"로부터 "옥탑 위의 빤스"로 이행하는 시인의 연상이 신선하다. 조정래 선생의 말대로 시인은 특별하다. 10년도 더 지난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가 끝났다>가 아직도 베스트셀러라는 점은 시인의 성찰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준다. 도대체 시인들의 이런 통찰과 성찰은 어떻게 길러진 것일까? 타고나는 것일까? 새삼 감탄하며 부러움을 느낀다.
부러워만 할 때가 아니다. 특별한 이 책 덕분에 철학과 시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오랫만에 내 인생에 훈풍을 날려줄 책을 만났다. 봄이 오는가 했더니 손님이 갑자기 온 듯하다. 철학과 시를 더 친숙하게 해준 귀한 손님이다.
▷ 마음에 드는 구절
P.14 예술이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
P.14 철학은 "삶을 낯설게 만드는 기술"
P.15 우리가 시집과 철학책을 멀리 하는 진정한 이유는 시나 철학에서 자신의 일상적 삶을 동요시키는 듯한 불쾌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시나 철학이 난해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P.40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 저부터 초월적인 절대자를 따로 설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 자신이 스스로 절대자일 수 있다는 내재적 종교 형태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P.47 사실 기형도가 대단했던 이유는 이런 절망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절망 상태를 철저희 응시했으며, 그것을 시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P.54 동일한 언어라도 사용되는 맥락이 천차만별이라는 것, 그래서 한 가지 의미만을 고집한다면 우리 삶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60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삶에서 안개와 구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언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만 한다"는 유명한 그의 명제도 바로 이런 발상에서 나왔다.
P.78 아렌트가 생각하기에 사유란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은다'는 것을 말하지요.
P.104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빠스"로부터 "옥탑 위의 빤스"로 이행하는 시인의 연상
P.110 바타이유의 생각은 '금지된 것은 인간에게 강력한 욕망을 부여한다'는 통찰을 전제로 전개됩니다.
P.118 가장 동물적인 것이어서 심지어 비천한 주제라고 폄하되었던 주제, 즉 에로티즘을 인간성의 핵심으로까지 격상시킨 것만으로 바타이유는 위대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P.128 벤야민은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가 나름대로의 고유한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비록 경제가 문화를 결정할 수도 있지만, 경제가 표현되는 문법과 문화가 표현되는 문법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고 본 것이지요.
P.131 벤야민의 아케이드에 주목했던 이유는 아케이드가 뒷날 유하가 보았던 압구정동 현대백화점과 같은 모든 백화점들의 원형이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P.135 자본주의 논리에 철저히 복종해야겠다는 의지를 훈육하는 공간이 바로 백화점이란 것을 벤야민은 누구보다도 빠르고 예민하게 포학해 낸 것이지요
P.142 내가 보기에 어떤 사람이 다르거나 낯설어 보일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타자라고 부른다.
P.143 아마도 매력적인 사람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낄 대 우리는 타자를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사랑의 신비는 우리가 처음 만난 사람을,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데도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P.153 타자 혹은 타자적인 사건과 마주치는 경험은 우리에게 다람쥐 쳇바퀴처럼 흘러가던 시간을 와해시키면서 전혀 다른 성격의 시간을 열어 놓기 때문이지요.
P.176 오직 예술가만이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모든 문학작품이 그런 것처럼, 누구나 쉽게 이 책을 읽을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이 책(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을 통해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맛볼 수는 없다
P.209 인간이 고독한 독백의 세계를 벗어나서 불안하지만 풍요로운 대화의 세계로 뛰어드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란 감정입니다
P.220 <꽃>은 고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원초적 열망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
P.233 1948년부터 시작되어 거의 50년간 집여하게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던 김춘수의 고뇌는 경이에 가깝다.
P.255 당시 최영미의 등장이 중요했던 이유는 그녀가 1980년대 운동의 시대를 뒤로 하고 자신이 느꼈던 사랑과 욕망의 느낌을 진솔하게 드러냈기 때문
P.256 사르트르의 '무'는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다는 것과,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본질을 만드는 존재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P.264 자신의 육체적 느낌이 몸으로 고스란히 표현되는 순간, 타자의 육체는 이제 살로 변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생각이지요. 최소한 이 순간만큼 타자는 나, 혹은 나의 손길에만 집중할 것이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상황에 빠지겠지요.
P.267 흥미로운 것은 아직도 최영미 시인의 이 시집이 베스트셀러라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그녀의 시는 우리 여성의 삶을 보편적으로 성찰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P.274 아도르노의 결론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는 광기나 비정상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이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성' 혹은 '합리성' 때문에 발생했ㄷ는 것입니다.
P.293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다면 육신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것이 되고 맙니다.
P.302 '현재'라는 것은 그 자체로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와 구분되면서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P.327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간결한 압축미를 자랑하는 것이 시라지만, 짧아도 너무 짧은 시입니다.
P.339 스피노자의 위대함은 그가 우리에게 몸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었다는 데 있다.
P.346 당시는 암울했던 일제 시대이니까 이상도 주권을 빼앗긴 조선인으로서 울분과 회한을 가진 삶을 영위했다고 추측할 수 있겠지만, 그의 실제 삶은 그런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상은 백화점을 중심으로 해서 펼쳐진 경성의 화려한 소비 문화에 흠뻑 빠져 있던 모던보이였으니까요. 다시 말해 그의 삶이 지행했던 것은 민족도, 독립도 아니었고, 단지 모던한 삶이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P.350 '모던'이란 말은 특정 시대만을 가리키는 특수한 용어가 아니라, 자심의 삶이 과거보다 새로울 때 언제든지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보아야겠지요.
P.351 19세기 서양 근대 사회를 상징하는 것은 파리라는 도시와 보들레르라는 시인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 근대 사회를 상징하는 것은 경성이란 도시와 이상이란 시인이었지요.
P.352 쉽게 말해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소비자가 가진 기존의 상품을 낡은 것으로 만들면서, 산업 자본은 소비자들이 새로운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혹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P.353 '포스트모던'이란 말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단어는 '모던'이 아니라 '포스트'라고 할 수 있지요. 자신마저 낡은 것으로 뒤로 보낼 수 있어야만 '새로움'은 진정으로 새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P.355 이상이 자신의 권태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결국 미쓰코시 백화점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P.356 이상이 동경으로 가고 싶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곳은 식민지 본국의 중심, 즉 산업 자본주의의 메카라고 상상되었던 곳이니까요
P.377 '당신이 곁에 있어도 당신이 항상 그리운 것'이 사랑의 핵심
P.383 "승용차가 강물에 추락하면 상수원이 오염됩니다. 그러니 서행하시기 바랍니다."
P.384 <팔당대교 이야기>는 개인의 소중한 생명도 효율이란 논리로 무화시키는 현대 사회의 단면, 다시 말해 개인을 그 질적인 고유성이 아니라 양적인 존재로 사유하는 세태에 대한 풍자
P.404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반도의 도시는 100여 년 전까지는 중국 사유가, 그리고 100년 전부터는 서양 사유가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P.413 "하루 종일 두드렸는데도 클릭 한 번 잘못 하면 도로아미타불! 하루 종일도 아니고 30분쯤 씨앗을 뿌리면 어김없이 싹이 튼다." - 김준태
P.415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도시, 자본주의, 대의제는 우리 삶 깊이 하나의 주름으로 각인되어 버린 것입니다.
P.416 낯섦이란 이렇게 타자에 대한 것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낯섦으로 전환되는 것
P.419 기쁨과 자유, 이것이랴말로 철학과 시를 포함한 모든 인문학의 궁극적인 꿈이자 인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P.420 젊은 시절 그렇게 난해해 보이기만 하던 시집들이 너무도 잘 읽히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합니다. 철학이란 학문이 인문학의 자식이라는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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