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 일기 쓰기부터 소설 쓰기까지 단어에서 문체까지
안정효 지음 / 모멘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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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화제가 된 소설가가 두명 있다. 소설 한 편으로 한 해에 문학상 셋을 휩쓴 정영문과 글쓰기 위해 결혼과 취업을 포기하고 40년 간 아르바이트로 살다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구로다 나쓰코다. 정영문은 '어떤 작위의 세계'로 한무숙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다. 아쿠타가와상은 일본의 최고 권위 신인문학상이다. 구로다 나쓰코는 75세란 나이가 화제가 되었다. 역대 최고령 수상자로 보통 10대 후반에서 20대 신예 작가가 타는 신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작가, 공통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소설은 재미있어야 하고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생각한다. 그런데 정영문은 '소설은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통념을 거부한다. 무려 '어떤 작위의 세계'를 재미만 좇는 소설관에 복수하는 심정으로 썼다고 한다. 구로다도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설에 대해 '메지지는 전혀 없다. 작품은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게 아니라 만드는 사람으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존재물을 장인처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 일갈한다. 이 두 작가는 평범하지 않다. 그래서 이런 자기만의 뚜렷한 작가관이 인정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처음 쓰려는 작가가 이들을 따라하면 안된다. 아무도 읽어 주지 않을 것이 뻔하다. 황새를 쫓아가려 하지 말고 기초부터 다지자.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글쓰기 만보>에 나오는 정도는 숙지해야 한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소설 쓰기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소설 한 편, 장편보다는 짧은 단편 한 편 써보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느끼게 된다. 작가의 말대로 단편이 장편보다 더 쓰기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처음 습작부터 장편은 무리다. 작가는 40년 이상 쌓은 소설쓰기, 글쓰리 노하우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다양한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인용한 내용 전개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며, 적시에 사용된 적절한 예로 독자의 이해를 도와준다. 영어번역 전문가인 작가의 독특한 이력은 작가의 특별한 작가세계에 큰 영향를 끼쳤을 것이다. 영어 원서를 보고 그 내용을 인용한 것이기에 내용이 더 풍부하고 신뢰가 간다. 이 책에 나온 내용만 충분히 숙지하고 글쓰기에 잘 실천한다면 좋은 성과가 기대될 정도다.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소설의 첫 문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존 오하라의 장편 소설의 첫문장 '그가 웃었다'로 함축되는 이 교훈은 지나치게 자세한 설명은 도리어 독자가 상상할 여지를 없게 만들고 호기심 유발에 실패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책 제목에 대한 내용도 흥미롭다. 안정효 작가의 대표작 <하얀 전쟁>도 원래 제목이 아니라 미국에 출판되면서 지어진 제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내용도 미국측 편집자에 의해 상당부분 바뀌었다는 에피소드는 '편집자의 파워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작가의 글쓰기 자료 수집에 대한 팁도 아주 유용하다. 소설이나 실용문이나 영감을 받아 한달음에 쓰는 일은 정말 소설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어떤 주제나 컨셉이 잡히면 몇 년이고 자료를 모으고 숙성해야만 제대로된 글을 쓸 수 있다. 기성작가들의 창작론, 글쓰기 책은 많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앞으로도 이런 책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 마음에 드는 구절
P.48 하나의 작품에서는 첫 장면, 특히 첫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며, 그것은 단편소설의 기본적인 공식이기도 하다.
P.71 글쓰기는 모든 과정에서 일단 '영감'에 따라 초고를 만든 다음에는 냉정하게 구석구석 뜯어보고 검토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며, 제목 달기도 마찬가지이다.
P.109 수많은 단어를 계속해서 머리에 담아 넣고, 샘물을 퍼내서 마시듯 계속 퍼내야 한다. 샘물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고, 오히려 자꾸 퍼내야 물이 썩지 않고 맑아진다.
P.147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의 성격과 심리를 그려내려면 이렇게 나쁜 쪽으로 잔머리를 굴리는 훈련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P.156 1인칭 화법이나 의식의 흐름처럼 주인공의 관점이 지배하는 소설이 아니라면 그래서 작가는 등장인물 가운데 어느 누구도 역성하거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P.170 자전적 소설을 쓰려는 사람은 자신의 얘기를 타인의 눈으로 보고 3인칭으로 말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P.198 도시형 방송극에서는 부르주아 계층의 신변잡기식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지만, 그들보다는 변두리 사람들이 보다 기름진 문학의 밑거름을 제공하고, 지식인보다는 푼수가, 중심자보다는 변방인의 훨씬 극적인 면모를 지닌다.
P.238 이런 실감을 작가가 확보하기 위한 가장 안전한 길을 자신이 쓴 글을 집필이나 퇴고 과정에서 소리 내어 읽는 방법이다. 특히 최고 과정에서는 까다로운 대화가 개성의 본질에 어울리도록 가다듬어야 한다.
P.244 따옴표는 타인이 사용한 어휘나 표현 또는 문장의 베끼기를 하면서 '인용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이지만, 때로는 시작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서도 자주 사람들이 사용한다.
P.252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보다 광범위하게 모든 문학 작품의 '종결'이라는 뜻을 각제 된 '풀어내기'의 대가는 애거타 크리스티이겠다.
P.271 명동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버스를 타고 기차를 쫓아가는 노박의 흥분감을 상상했고, 그녀가 쫓아오는 줄도 모르고 털사까지 가서 나중에 노박을 만나면 홀들이 얼마나 감격할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P.278 작가이면서 창작법의 이론에도 일가견이 뛰어났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해서, "원칙을 너무나 몰라서 글쓰기를 그렇게 할 줄 모르면서도 인간을 엄청나게 감동시키는 작가"라고 말했는데. 무엇인가 한 면이 두드러지게 뛰어나면 사실상 다른 약점들은 잘 안 보이기 쉽다.
P.284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이 참으로 초라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모두들 그렇게 비슷비슷하고 하찮은 삶을 살아왔는지, 왜 대부분의 인간은 "이것은 내 인생이오."라고 떳떳하게 내놓을 만큼 탐탐한 삶을 살지 못할까 마음이 아파진다.
P.288 "나는 무슨 일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원했던 때가 전혀 기억에 없어. 난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리 막아내느라고 애를 쓰면서 평생을 보냈으니까 말야."
P.296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게으른 자의 핑계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준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혹시 어떤 영감이 떠오른다고 해서 냉큼 그 순간 당장 글을 쓰기 시작하는 대신, 그 착상을 키우고 가꾸며 상당한 기간에 걸쳐 작품으로 만들려는 준비를 착실하게 계속해야 한다.
P.304 이렇듯 실존 인물이나 역사적인 사실을 작품의 필요성에 따라 가공하는 의도적인 왜곡 작업을 문학용어로 창작적 일탈이라고 한다.
P.307 어느 정도 작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 콩트나 수필 같은 조작글을 써달라는 청탁서가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오는데. 바로 이런 때가 성공한 다음의 몸가짐과 작품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할 시기다. 성공의 단맛에 도취되고 흥분하여 아까운 정보를 부스러기로 낭비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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