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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 이어령의 첫 번째 영성문학 강의
이어령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10월
평점 :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 이어령
문학·역사·철학을 가리켜 인문학이라 합니다. 지금 시대는 가히 인문학 열풍이라 할만큼 그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죠. 인문학 중에서도 소설이 읽기를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에요. 그렇지만 두꺼운 페이지와 곳곳에 숨어 있는 내용, 배경지식, 담긴 철학 등이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아직도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단순히 재미로 읽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되거든요. 스티브 잡스가 그렇게 강조했던 인문학이 그리 간단하지 않겠죠. 살아가는데 큰 의문을 풀어주는 것이 인문학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소설이나 시, 철학 서적을 읽어봐도 ‘여기서 무슨 뜻을 더 읽어내야 할까?’ 생각만 들 뿐입니다. 읽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그렇겠죠.
정말 읽고 싶었던 소설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두꺼운 인문학 책이라서, 수준 높아보이는 소설책이라서 감히 도전을 못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어령 선생의 친절한 설명으로 이 소설들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이렇게 총 다섯 권의 이야기를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으로 읽어줍니다. 그래서 ‘영성순례’라는 제목이 붙어있죠.
물론 이 책을 다 읽어도 이해가 안 됩니다. (이 책을 한 번 읽은 사람들을 위한)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라고 제목을 지어야 할 것 같아요. 레 미제라블은 우리가 어렸을 때에 한번씩은 다 읽어본 내용이잖아요? 물론 아주 간단한 유아용이나 청소년용으로 말이죠. 그런데 이어령의 해설로는 레 미제라블의 내용은 없습니다. 어떠한 장면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어떤 종교적 의미가 있는지 알려줄 뿐입니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합니다. 대혁명 이후에도 가난하게, 역사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합니다. 이런식으로 소설을 재해석해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내용을 모르고는 이해가 안 되네요.
책을 덮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책을 읽고 어떤 점을 배웠나 말이죠. ‘위대한 고전이라고 너무 겁먹지 말자. 지금 내가 이해하는 수준이 낮더라도 무언가 배우는 것이 있다. 이렇게 종교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느냐? 내가 처한 상황과 고민하고 있는 문제, 나의 인생관과 철학 등에 도움을 줄 수 있다’라는 점을 배웠다 하겠습니다.
- 거리로 메고 다니는 거울 : 소설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까닭.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세상살이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민낯을 볼 수 있다.
- 소설(小說)은 소인들의 이야기다.
카라마조프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는 각각 제정(帝政)이 붕괴하고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 러시아의 세 측면을 대표하는 인물들
-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에서 제정 러시아 말기의 혼돈, 전락하는 귀족과 지주들의 속살과 갈팡질팡하는 지식인, 그리고 기득권을 가졌던 귀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 무신론자라고 할지라도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신의 영역을 생각해보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 도스토옙스키는 평생 노름빚에 쪼들려서 급히 글을 쓰는 바람에 구성도 문장도 빈틈이 많고 매끄럽지 않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푸리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사회주의는 오늘날의 마르크스 계통의 사회주의와는 다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끼리 따뜻하게 사랑하는 푸리에 식의 사회주의.
- 바쁜 사람은 <찬반론>. <대심문관>편 파뿌리 이야기만 읽으셔도 좋아요.
- 러시아를 알려면 ‘40’을 알아야 한다더군요. 얼마나 치열한 곳인지,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것에 40을 곱하거나 보태지 않으면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하 40도, 알코올 도수 40도, 40명, 40킬로미터.
- 큰아들인 드미트리는 첫째 부인의 자식이고, 이반과 알료샤는 두 번째 부인의 소생.
- 스메르쟈코프는 카라마조프 집안의 보잘것없는 하인인데, 동네를 떠돌던 여자 거지가 낳은 자식입니다. 간질병 환자인데 천재적인 데가 있어요. 니힐리스테아다 반항적이고 전통과 현 사회에 아주 한이 많은 인간. 비극적인 아웃사이더.
- 이반과 알료샤와 드미트리는 각각 진선미를 뜻한다.
- 뜬 정신을 가지고 있고 낭비벽도 있지만, 가장 슬라브적인 인물이 드미트리예요. 전통을 이어받았으면서도 근대화된 인물입니다. 한편, 이반처럼 유럽적 지성을 갖고서 사회주의적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 끝에는 가장 종교적인 인물인 알료샤가 있습니다.
- 물고 물리는 애정 관계
그루셴카 알료샤 리자 이반 카체리나 드미트리 그루셴카
표도르 -> 그루셴카
- 대심문관은 기적, 신비, 권위가 아니면 옛님이 맡기고 간 이 땅에 더 이상 그들을 잡아둘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우리들이 1,500년 동안 잘했기 때문에 교회가 유지된 것이다.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단을 처형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내세의 존재를 확신시키고, 사람들을 묶어두기 위해서 그들에게 현세적 이익을 주었기 때문에 이 정도이다.
교회의 역설입니다.
- 이반은 아주 이성적이고 악마 같은 지성인.
- 우리들이 함께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그’(악마)요.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비밀이지.
대심문관.
- 그러나 갑자기 그는 아무 말 없이 심문관에게 다가오더니 아흔 살 노인의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는 거야. 이것이 그의 대답의 전부야.
예수의 대답
-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 러시아 전선에 배속된 그는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여러 차례 읽었다고 합니다.
-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잖아요.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기적을 믿을 것을 우려하셨기 때문이지요. 부활은 믿지 않고, “아무개 딸을 살렸다면서?” 하고 몰려오는 것.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 대심문관이 예수님에게 가하는 비판에 대해, 알료샤는 이반의 말이 오히려 예수님을 찬미하는 말이라고 했고, 조시마 장로는 드미트리가 자신에게 던지는 비난에 침묵으로 답합니다. 둘 다 그들의 황량한 영혼을 불쌍하게 여깁니다.
-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위대한 죄인의 생애’라는 제목의 좀 더 방대한 내용으로 구상했고, 속편을 쓸 계획이었습니다. 출판사에 마지막 원고를 보내면서도, 앞으로 20년은 더 살면서 작품을 쓸 것이니 작별인사는 하지 않겠다는 메모를 첨부하지요. 그처럼 이 작품을 서곡으로, 알료샤가 20년 후에 겪는 이야기가 더 이어져야 했습니다.
- 아무리 나쁜 사람들도 파 뿌리 하나는 있습니다. 이 파뿌리의 잔치가 열립니다. 우리는 성스러운 성찬식이 아니라 가난한 동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고, 초대받은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넉넉한 포도주를 주십니다.
- 혐의를 받은 것은 드미트리였지만, 실질적으로 아버지 죽이기를 사주한 것은 이반이었다. 드미트리는 슬라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유럽은 관념이며 무덤일 뿐, 살아 있는 대지와 생명력은 러시아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러시아주의자다. 반대로 이반은 프랑스의 자유사상과 급진사상에 경도된 유럽주의자다. 작품에서는 니힐리스트로 나오는데, 이때의 니힐리스트는 우리가 생각하는 허무주의자와 다르다. 당시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 서구주의자들을 부르는 이름이 니힐리스트였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락된다고 생각하고 전통 종교를 부정하는 무신론자, 자유사상가가 이들이었다.
- 스메르쟈코프가 깨달은 것은 ‘신이 없어도 모든 것이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이다.
-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형제들이지만, 모두 아버지 카라마조프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카라마조프의 피라는 것은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과 욕망이다.
말테의 수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덴마크 귀족 출신의 젊은 시인 말테가 파리에서 죽음과 불안에 떠는 영락한 생활을 하면서 쓴 수기 형태의 글로서, 통일된 줄거리가 없습니다.
-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통일된 견해,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임이 관통하고 있지요.
- 적어도 생명이 뭔지를 아는 사람은 『말테의 수기』를 읽다가 ‘아, 이런 게 삶이구나’ 하고 뭔가 찡하게 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 이 작품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다한다.
- 여자들이 아이를 잉태하고 서 있으면 ... 그 커다란 배 속에는 두 개의 열매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태어날 아이였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였다.
생명과 죽음이 함께 있는 자기 배를 만지지요. 이러한 임산부 이야기가 『말테의 수기』에서는 반복해서 나옵니다.
-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엔 죽음, 저쪽엔 생명이 있어. 여자로 치면 아이를 밴 것인데, 쌍둥이ㅑ 그게. 죽음과 생명이라는 쌍둥이지. 사람들은 모두 쌍둥이를 낳아. 한쪽에선 죽음이 자라고 한쪽에서는 생이 자라.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은 죽는 거야. 한 살 때부터.
- 색연필이 저 혼자 굴러가더니 책상 아래로 툭 떨어집니다. 『말테의 수기』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움직이지요. 거울이 그렇고, 죽음이 그렇고, 냄새가 그렇고,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사물들이 돌아다닙니다.
- 마치 과일 속에 숨겨진 씨처럼, 누구나 각자의 죽음을 품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장엄했습니다. 생명이 대단했기 때문에 죽음도 대단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죽음은 너무나 하찮게 다루어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명이 너무나 하찮게 다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권이나 소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너무 빈약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과 삶도 얄팍한 것이지요.
- 얼음에 붙어 떨어지고 늑대에게 먹힌 이 얼굴에 대한 묘사가 마치 손자국이 남은 얼굴처럼 완전히 물체화된 얼굴 이야기라는 것을 실감 있게 느낄 수 있습니다. 상징과 이미지로 읽어야지, 그냥 현실로 읽으면 얼음에서 얼굴을 떼어내니 갈가리 해체되고 말더라 하는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지요.
- 남쪽의 세계는 색채가 가득한 바깥의 세계이다. 반면 내면의 세계, 환상의 세계는 북쪽에 있다.
탕자, 돌아오다. 앙드레 지드
- 잃은 양의 비유,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심정은 유목민 목자가 아니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아흔아홉 마리는 내 곁에 있으니 괜찮은데, 무리에서 벗어나 늑대 천지에서 매매 하고 다닐 한 마리는 너무나 불쌍하지.
-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쭉정이를 위해서 메시아가 온다.
- 『탕자, 돌아오다』는 반기독교 소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그래, 가려면 식구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가거라, 내가 도와주마.’ 그리고는 이렇게 등불을 들고서는 동생을 배웅합니다. ‘나는 실패해서 돌아왔지만, 너는 네가 찾는 것을 찾아야 한다. 형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거야’ 하면서 등불로 발밑을 밝혀주지요. 그러면서 소설은 이렇게 끝납니다. “현관 앞 계단 조심하고…”
- 또 다른 세계의 말라비틀어진 야생 석류 맛을 아는 인간들, 그 갈증을 통해 이게 삶이다, 이게 살아 있는 거야, 하고 외치는 그런 인간들이 나올 것이다.
- 앙드레 지드는 개신교 집안. 동성애 경험. 이로 인해 인생의 희열과 관능성을 깨닫는 일대 계기가 된다. 그리하여 지드는 과거 자신을 구속했던 억압적 도덕주의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자유와 욕망을 긍정하는 도덕을 건설하는 일을 이후 평생의 문학적 과제로 삼는다.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 프랑스 혁명의 배경에는 이성에 대한 신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성의 힘을 믿던 시절이었습니다.
- 레미제라블 이전에는 어린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은 19세기의 산물.
-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대혁명을 다룬 소설이 아니다. 대혁명이 일어난 뒤에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 여전히 환멸을 갖고 있는 이들, 지식인의 이야기가 헛된 것으로 여겨지던 이들의 이야기.
- “(빵이 없다면) 그러면 브리오슈(쿠키)를 먹지 왜들 야단이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말이 아니다.
- 역사라는 것은 근접해서 들여다보기보다는 항상 멀리서 보는 것이고, 당시 강자의 편에서 쓰이게 마련이다. 반면 소설은 살아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구약은 왕들의 이야기지만, 신약은 창녀, 세리, 이름도 없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야기. 소설이 역사보다 중요한 까닭은 역사가들이 놓친 것을 소설이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
- 미제라블 : 비참한, 불쌍한. 모두가 비참한 사람들이다. 이를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는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