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SF 연작 소설집이다. 뒷장에 실린 작가의 말을 읽다가 알았다. 이 소설은 포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걸. 그리고 소설의 대부분이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라는걸. 그도 그럴게 소설 속의 참 많은 부분이 실제 작가의 삶과 닮아 있다. 그래서 어쩌면 작가의 생각과 이야기가 가장 많이 담긴 소설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의 말을 다 읽고 보니 어쩐지 책장을 다시 뒤적거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따로 표시해뒀던 문장을 여러 번 되돌아 읽어보고 작가가 전하고 싶은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해양 생물들을 주제로 한 여섯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말하는 문어를 시작으로 '나'와 '위원장님'은 자꾸만 말하는 해양 생물들을 마주치게 되고, 그때마다 정체 모를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연행되고, 취조 받고, 풀려나는 과정을 반복한다. 난데없이 대학 본관에 나타난 문어와 러시아어를 하는 대게, 루비빛 상어 등 엉뚱하고 혼란스러운 이야기처럼 다가오지만, 조심히 들여다보면 바다와 인류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를 시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적당히 유머러스하고 적당히 진지하다.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전달해 쉽게 읽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노동자의 생존권과 장애인의 이동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등 현재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 사회의 현안들을 작품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야기들, 또는 전혀 모르고 넘어갔을 문제들을 해양 생물들과의 기묘한 만남을 통해 조망한다. 어쩌면 황당하고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할지도 모를 이야기 속에는 치열한 투쟁의 움직임과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저항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작품 속 문어가 집요하게 외쳤던 문장이 있다.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이 말이 내겐 꼭 경고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점점 망가져 가고 있으니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이렇게 안일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고. 아마 우리는 소설 속 인물들처럼 종을 뛰어넘은 연대가 필요한 세상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미 그런 세상으로 발은 디뎌놓았다면, 부디 모두의 목소리가 모여 터전을 지켜내는 물결이 되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