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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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시집이라고 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더구나 이 작품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 출간한 첫 시집이라는 것, 그리고 올해 10월 생을 마감한 시인의 마지막 시집이라는 거예요. 전체 시집을 아우르고 각 시들이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 전반적으로 조망해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가 시인의 모든 시집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시집 한 권에 집중해봅니다.


총 열여섯 편의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고 그중 '어떤 기억'에서 시인은 병이 자신을 찾아온 후 "나와 같은 사람들"을 찾으려 했다는데요, "친구들"을 찾아 강가를 걸었고, 이야기도 했지만 말보다 강이 더 좋았노라고, 결국 그 강에 대한 기억으로 시가 마무리됩니다. 독백처럼 전개되는 또 다른 시 '밤에 하는 생각'을 보면, 아기였던 자신을 그려보는 듯해요.


그 기억과 끊어진 채

내가 말을 하게 된 게

어찌나 창피한지. 우리 엄마의 사랑!

너무 빨리 나는

진짜 내가 되었다,

탄탄하나 신랄하다,

알람 시계처럼.(시집 33-34쪽)


앞선 시의 끝부분입니다. 위의 세 번째 대목에서 의구심이 들었어요. 엄마와 교감했던 태초의 순간 이후 말을 하는 아이로 성장한 것이 왜 창피할까 하고요.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어느 순간 정확하지만 냉정하게 느껴져서 특히 밤 시간에는 듣고 싶지 않은데요, 시인이 표현한 "탄탄하나 신랄"의 의미도 그와 비슷할까요. 그런데 시인은 그런 시계를 곧 "진짜 나"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엄마의 탯줄(품, 도움)에서 벗어나 어엿한 어른이 되지만 정작 그 모습은 어떠한지. 아주 막연하게 저자가 느낀 창피함이 어떤 맥락인지 알 것도 같아요.


이 시집에서는 대화체가 많이 나와서 특이하다고 느꼈어요. 시인의 목소리는 컨시어지(이는 안내인에 한정되지 않은 여러 층위의 목소리들을 대변하고 있어요.), 선생님, 여동생 등 다양한 대상과 말을 주고받거나 그들의 말을 인용하지요. 다음은 '가을'이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인생은, 여동생이 말한다,

횃불 하나가 몸에서 마음으로

지금 막 지나간 것 같아.

슬프게도, 여동생은 계속 말했다, 마음이

그걸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네.(시집 29쪽)


시집의 표제이기도 한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은, 겨울이 올 때마다 숲에서 이끼를 모으고 삭히는 노인들의 이야기입니다. 12월을 "어둠의 달"로 표현하면서, 시인은 판매용 샌드위치를 포장하는 곳의 문구를 이렇게 인용해요.


카드 위에 한자로 일의 순서가 씌어져 있었다

번역하자면, 같은 순서로 같은 일을 할 것,

그리고 그 아래엔 : 그것들의 기원을 우리는 지워 버렸다,

이제 그들에겐 우리가 필요하다.(시집 23쪽)


단순 노동의 경우 정형화되고 반복적인 틀이 있지요. "같은 순서로 같은 일"의 의미를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지만 뒤이은 문장들에 이르면 궁금해져요. 우리가 기원을 지워버렸고, 그들에게 우리가 필요하다니. '옮긴이의 말'을 참고해보면, "변형시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에 우리 손길이 필요하다는 의미하고 해요. 나아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어떤 기원을 지우고 없애는 일이라는 거예요. 어떤 대상의 기원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기원도 지운다는 것입니다. 기원을 지워버렸다는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만드네요. 옮긴이의 다음 해석에 공감하면서요.


다른 방도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자리, 희망이 꺼진 자리, 내 생명이 스러지는 자리를 응시하면서도 우리는 다만 한다. 같은 일을 같은 순서로.(해설서 16쪽)


결국 같은 일을 같은 순서로 하는 것은 비단 협동 농장의 노인들의 단순 작업에 국한된 의미가 아니었어요. 어쩌면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이, 그런 하루하루가 쌓이고 모여서 만들어지는 인생이 그렇겠지요. 때로는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 시간 낭비라고 푸념하다가도, 그 안에서 소소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넉넉히 살아가기도 하고 겨우 버텨내기도 하는 날들 모두 지워지는 시간이 오겠지요? 시인은 나이 들고 병들어가는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죽기 전까지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으니, 온몸으로 "같은 순서로 같은 일을 할 것"을 독자에게 당부하는 듯해요.


노벨문학상처럼 큰 상을 받은 이후라면, 그 영광과 주변인들의 환호에 들뜰 법도 할 것 같은데요, 시인은 그 상을 받은 바로 다음 해 <협동 농장의 겨울 요리법>을 출간했을 정도로 글 쓰는 일에 몰두한 셈이군요. 솔직히 제목만 보고 따뜻하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예상했어요. 그러면서 '협동'이라는 어감이 뭔가 이질감을 준다는 생각도 했었고요. ('옮긴이의 말'을 통해 왜 그 단어가 선택되었는지, 시인이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가끔씩 팍팍해진 감성에 물기가 필요해서 시집을 펼치곤 하는데요, 이번 시집은 많이 특별했어요. 이 글을 쓰는 지금이 12월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마음이 울적해지는 상황이기도 해서 더욱 시인의 시를 천천히 읽게 되었던 듯해요. 이 구절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고 의문도 가져보는 시간이었어요. 돌아오는 해에도 "같은 순서로 같은 일"이 반복되겠지만, 이전과는 다를 것 같아요. 달라야겠지요. 시인은 담담히 응시한 듯하나 저는 절실히 매달리고 싶어져요. 지금의 감상은 여기까지입니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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