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안에 당신의 수명이 들어 있습니다
니키 얼릭 지음, 정지현 옮김 / 생각정거장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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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이 새겨진 상자가 현관문 앞에 나타난다면?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내 수명을 의미하는 끈이 들어 있다면? 이 소설은 이런 상상을 토대로 이야기를 뻗어간다.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 22세 이상의 모든 성인 앞에 나타난 이후로 매일, 그날 스물두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사람은 상자를 받았다.(26쪽)

잡지사 편집자 니나는 연인 모라와 함께 상자를 열어본 다음 슬픔과 무기력과 쓸쓸함을 느꼈다. 자신의 끈은 길었지만 연인의 끈이 짧았기 때문이다. 모라와 함께 늙어갈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끔찍한 진실"과 마주해야 했다. 과연 돈독했던 둘의 관계가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오히려 더 견고해질 수 있을까. 니나의 사연을 읽던 중, 유의미한 문장들을 발견했다.

상자는 이제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은 니나가 바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주도권과 명료함을 되찾기로 마음먹었다.(63쪽)

소설 속에서 상자와 끈이라는 상징적인 설정을 했지만, 실상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신의 이름으로 주어진 생의 길이를 살다 간다는 사실. 어쩌면 상자와 끈은 동일어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상자는 끈을 담는 그릇에 불과할 터. 결국 상자는 유한한 인생이고 그것은 소설 인물인 니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 바꿀 수 없는 일이다. 니나에게 "주도권과 명료함을 되찾기"란 긴 끈과 짧은 끈의 운명, 그로 인한 혼란스러운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몸부림 같은데, 독자마다 그 의미는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소설 속에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고 자기 상자를 열어본 후 자신의 끈을 확인하는 내용들이 이어진다. 이야기는 개인들의 사연뿐 아니라 국가적인 혼란 양상도 담고 있다. 어리석은 이들이 자신의 긴 끈이 가진 한계를 시험하거나, 짧은 끈을 가진 이들이 위험한 일탈을 감행하거나, 당장 어떤 질환이나 증상이 있는 게 아닌데도 끈이 짧다고 무조건 병원 치료를 해달라고 우기거나, 유력한 대선 후보자가 짧은 끈을 가진 이들을 차별하는 데 앞장서고 그런 여론을 교묘히 이용하는 모습 등. 전 세계 소식 중 북한도 언급되는데 그곳은 상자를 받으면 아예 열지 말고 무조건 당국에 제출하는 조치를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라도 볼 사람은 보지 않을까 싶다.)

건축가 벤은 "짧은 끈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자조 모임에 참여하는데, 여자친구 클레어가 벤의 짧은 끈을 확인한 후 떠나간 뒤다. 그는 그 모임에서 모라를 만나고 나중에 모라의 연인 니나의 여동생 에이미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이처럼 개별적인 사연들은 연결 고리가 있어서 서로 얽히고설켜 있다. 이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개인적으로는 니나-모라보다는 벤-에이미 중심으로 형상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벤과 에이미가 서로 몰랐을 때 나누었던 편지 왕래도 그렇고, 에이미가 끝까지 자신의 상자를 열어보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인물들인 까닭이다.

끈이 나타난 후로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너무 크고 무거운 생각들로 바뀌어버렸어요. 사실상 삶과 죽음에 대한 대화뿐이죠. 작고 사소한 일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시절이 그립네요.(133쪽)

에이미가 벤에게 썼던 편지 내용의 일부다. 일상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코로나가 휩쓸었던 몇 년간의 모습도 겹쳐졌다. 메멘토 모리도 상기할 필요가 있지만 일생은 소소한 일상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니 끝이나 종말에만 집착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러나 삶의 유한성을 알고 있다는 것과 막상 자기 삶의 남은 시기를 분명히 알게 된다는 것은 천양지차일 것이다.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 인생의 노년기에 접어들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끈이 짧다고 실감하게 될 텐데, 작가는 소설의 설정 곧 끈이 든 상자를 받게 되는 22세 시점부터 삶의 유한성과 가치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자고 말하는 듯하다.

소설 속에서 의사 행크, 사관학교 생도 잭과 하비에르 등의 사연도 살펴볼 수 있다. 이야기는 서른 살 니나가 적어도 마흔 이상이 되는 시점까지 다룬다. 에이미의 편지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해본다.

지금 우리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최대한 피하려고 해요. 병에 대한 이야기를 꺼리고 죽어가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병원과 요양원에 고립시키고 국립묘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한참 가야 하는 외딴곳으로 밀려났죠. 짧은 끈들은 죽음을 혐오하는 이 시대에 새롭게 고통받는 집단이 된 것 같아요. (중략) 물론 상자 안에 든 끈의 길이가 우리의 수명을 뜻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가진 인생의 수명은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몰라요. 상자가 아니라 우리 안에 삶을---진정한 삶의 질을---측정하는 수많은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만의 방법으로 측정한다면 당신은 행복할 수 있어요. 잘살 수 있어요.(319-320쪽)

남은 생을 의미하는 끈이 든 상자가 문앞에 있다면? 열어보게 될까, 아니면 상자를 저만치 치워버리게 될까. 이 질문을 스스로 해보는 것을 시작으로, 삶과 죽음, 소중한 일상, 진짜 가치와 헛된 욕망 등의 사유로 가지를 뻗어간다. 분주하고 지친 하루라는 이유로, 자꾸만 뒤로 미루게 되는 성찰을 내 앞으로 잡아당겨본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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