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 자유로운 삶을 위한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장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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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하게 자유로운 사유자로 알고 있던 장자 사상이 궁금했었다. 언젠가 독파하고 싶었던 책인데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고 어떤 판본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최근 김원중 교수의 번역서가 나왔다. 저자는 <논어>, <맹자> 등 20여 권의 고전을 번역한 바 있다. 이 책은 곽경번의 <장자집석>을 저본으로 삼아 여러 편의 주석본을 참조했고, 저명한 주석가들의 해설과 국내 번역본들의 내용을 비교 분석했으며, 내편과 외편, 잡편 등 총 33편을 전체 해제, 각 해설, 소제목과 번역문, 원문, 각주 순서로 구성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장자 사상을 간략히 이야기하면서 오늘날 장자가 던지는 질문을 사유할 필요를 역설하는데, 다음 대목이 있다.


"인간이 스스로 정하거나 성현들에 의해 설정된 가치 기준과 삶의 목표가 얼마나 덧없고 초라한지 한없이 번민하고 회의하게 만드는 힘이 스며 들어 있는 책이 <장자>이다. 유한한 삶을 위해 허덕이며 사는 우리에게 장자는 '어떤 삶을 살아가면 좋을까?'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7쪽)


장자는 전국시대 초기 송나라에서 태어난 인물로, 내편에서는 치밀하고 집약된 그의 사상을 담았고 외편에서는 내편의 사상을 부연 설명하면서 유가를 비판하는 목적이 강했다. 외편과 함께 잡편은 장자 사상을 이어받은 후학들에 의해 지어진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런 대략의 설명을 바탕으로, 저자의 해설을 가이드 삼아 본문을 읽어가게 된다.


유명한 '호접몽'의 내용 원문은 간략하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깨어보니 장주의 모습이었다는 것. 장주의 꿈에 (장주가)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의 꿈에 (나비가) 장주가 된 것인지. "장주와 나비는 반드시 구분이 있으니, 이것을 만물의 조화라고 말한다."(97쪽)는 서술만으로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저자 해설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만물의 조화란 어떤 분별이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인간이 끊임없이 시비를 가리려 하고 논쟁을 즐기는 행태를 비판하면서, 장자는 사물과 자아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며 융합하는 '물화'를 강조한다. '호접몽'의 경지는 주체와 객체의 상호 융합이 보여주는 예술의 최고 정신인 셈이다.


4편 '인간세'에서 장자는 무도한 통치 세력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밝힌다. 무념과 달관의 경지, 잊힌 존재로 타고난 수명을 누리라는 것,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이상주의자 대신 차라리 미치광이처럼 살라는 말을 한다. 6편 '대종사'에서 장자는 '도를 스승으로 모시는 진인'이 어떤 이들인지 여러 인물들로 보여주고 노자의 '도'론을 계승하면서 도의 체득 과정에 대해 서술한다. 장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은 7편 '응제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제왕은 세속적 의미의 군주가 아니라 도를 터득한 사람이다.


8편 '변무'에서 장자는 백이나 도척이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수양산 아래에서 명성을 위해 죽은 백이, 동릉산 위에서 이익을 위해 죽은 도척 모두 자기 생명을 해치고 본성을 상하게 한 점은 같다는 맥락이다. 이를 두고 군자, 소인의 구분이 무슨 의미냐는 것이다. 관련된 원문을 보자.


"남이 즐거워하는 것을 즐거워하지만 자신이 즐겁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즐거워하지 못하면 비록 도척과 백이라도 이는 똑같이 지나치고 치우친 것이 된다. 나는 도덕에서 부끄러우니 이 때문에 위로는 감히 인의를 붙잡지 않고, 아래로도 감히 지나치고 치우친 행동을 하지 않는다."(222쪽)


장자는 인의에 입각해 천하를 다스리기보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존중하는 입장을 강조한다. 장자는 10편 '거협'에서 유가의 인과 의가 가식이라고 말하고, 11편 '재유'에서 도덕이나 법에 의한 구속과 억압을 경계한다. 16편 '선성'에서 지혜와 본성을 잘 조화시키되 지혜보다 무위로 몸을 보전하라고 강조한다. 사물에 자신을 잃고 세속에 본성을 잃지 않는 상태를 지향한다.


24편 '서무귀'에서는 세 부류의 인간이 제시, 비판된 후에, 크게 미혹되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26편 '외물'에서 장자는 혜자에게 "쓸모없는 것이 쓸모가 된다는 것도 분명하지."(633쪽)라고 말한다.


장자는 마음으로 도를 버리지 않고 인위적인 것으로 하늘의 도를 조장하지 않는 자를 '진인'이라고 말했다. 지극한 덕의 세상은 짐승들과 같이 살고 무리 지어 만물이 나란히 했던 모습이었는데, 도덕을 훼손해 인의를 만든 성인들 때문에 백성들이 타고난 본성과 성정을 떠나 어지럽고 치우친 예를 행하게 됐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성인과 지혜가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맥락이 좀 혼란스러웠다. 그러다가 다음 문장에 이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구하는 것만 알고, 자신이 이미 아는 것을 구하는 것은 알지 못하며, 모두 좋지 못한 것을 비난하는 것만 알고, 자신이 이미 좋은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크게 어지러워진다."(242쪽)


위 문장을 곱씹어본다. 유명하거나 권위 있는 사람, 친분 있거나 존경하는 사람의 말에 미혹되어 자신의 생각을 살짝 뒤로 빼버릴 때가 있다. 나보다는 저 사람이 맞겠지 하면서. 실제로 그랬던 경우가 좀 많았던 지난날을 돌아본다. 무엇이 옳은가,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등 끊임없는 선택과 고민 속에서, 세상이 규정한 지혜와 순리에 의존했던 적은 없었나? 지금은 어떠한가?


반복해서 읽을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장자 사상은 내게 여러 의미로 다가올 듯하다. 지금은 여기까지로, 적어도 지혜에 대한 다른 맥락을 떠올렸다는 것, 기존의 사유를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해본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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