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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맛 - 연기부터 수액까지, 뿌리부터 껍질까지, 나무가 주는 맛과 향
아르투르 시자르-에를라흐 지음, 김승진 옮김 / 마티 / 2021년 11월
평점 :
나무에 관한 이야기면 무엇이든 좋다. 그런데 <나무의 맛>이라니, 제목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은 마음의 안식처와 같은 추상적, 심리적 의미가 아니라 '나무가 주는 맛과 향'이라는 부제를 달아 나무 자체의 풍미를 담고자 의도한 듯 보였다. 주와 찾아보기를 빼더라도 본문만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이를 만큼, 나무의 맛 이야기가 풍성할 수 있다는 데 먼저 놀랐다. 저자의 이력도 독특하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숲과 나무를 벗 삼은 이후 학창 시절 목공을 배웠고 대학에서 숲 생태학을 전공했으며 미식과학대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는 글에서, 저자의 집필 의도를 드러낸 표현이 있어 소개해본다.
"내가 사랑하는 나무들이 이미 우리의 음식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겠는가! 이렇게 해서 나는 3년간의 흥미진진한 나무 음식 탐험에 나서게 되었고 그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35쪽)
숲 생태주의자이자 음식 평론가, 목수인 저자가 펼쳐내는 글은 꽤 흥미롭다. 저자는 나무의 정의부터 시작해서 종교와 신화에 나타난 나무의 상징, 경제생활의 원천 및 기후변화와 관련된 나무의 중요성 등을 개요로 보여주면서,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 언제나 인간의 동반자였던 나무가 주는 맛의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나폴리의 피자 요리사, 모데나의 발사믹 식초 생산자, 피에몬테의 트러플 버섯 채집가, 남티롤의 와인 양조자, 산송(소나무) 요리사, 오스트리아의 위스키 제조자, 바이에른 주의 맥주 양조자, 독일의 미니 오이 피클 생산자, 런던 중심가의 차 상점 주인, 인도의 차 재배자, 케냐의 요구르트 생산자, 캐나다의 메이플 시럽 생산자, 아르헨티나의 공학자, 베트남의 향수 에센스 채집가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저자는 호숫가의 풀을 갉아 먹는 비버를 보고 영감을 얻어 나무껍질을 맛보기도 하는데, 실제로 북미의 몇몇 부족이 나무껍질, 엄밀히 말하면 안쪽의 부드러운 형성층을 먹기도 한단다. 스칸디나비아 원주민에게 소나무 형성층은 별미였다고 한다. 자작나무 형성층을 삶아보고 튀겨보며 맛을 음미해보는 저자의 실험 정신도 대단하다. 바삭하면서도 쫄깃한 나폴리 피자를 맛본 후, 저자는 전기 오븐과 너도밤나무 화덕에 동일한 피자를 각각 넣어 맛의 차이를 실험한다.
나무 화덕의 강렬한 맛을 체험한 다음, 저자는 나뭇잎, 차의 다양성을 맛보고, 위스키와 칵테일의 맛에 나무가 미치는 영향을 미각으로 느낀다. 나무통 숙성으로 술맛을 향상시킨다는 결론인데, 이런 대목은 특별히 술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울 듯하다. 업계에서는 오크 통을 많이 사용한다고 하는데, 실험이 일상인 듯한 저자는 임의로 나무 네 종을 고른다. 낙엽송, 검은오리나무, 마호가니나무, 유칼립투스. 이것들이 나무통으로 쓰일 경우 어떤 맛을 증류주에 보태게 될지에 대한 실험이다. 저자는 낙엽송 밀 맥주를 직접 만들기도 하고, 오크 향의 와인을 맛보기도 한다.
또한 저자는 나무의 향을 찾아, 유향과 우드(침향나무 에센스)를 소개한다. 덕분에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선물한 유향의 유래, 생소했던 침향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는데, 베트남전쟁이 베트남의 침향 생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이유가 씁쓸하게 다가왔다. 총알이나 폭탄 파편이 아퀼라리아 나무에 상처를 입힌 결과 침향이 많이 추출됐다는 것이다. 솔잎 페스토 파스타를 만들어 먹는 저자를 보면서, 인간들의 나무 맛 탐험은 앞으로 얼마나 더 무궁무진할까 싶기도 하고, 혹시 그 과정에서 나무를 주된 먹잇감으로 삼는 숲속 동물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을까 하는 생각도 얼핏 해본다. 물론 저자는 음식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나무를 활용하자고 말하지만 "자연적인 재생 속도를 넘어서는 정도로는 사용되지 말아야만"(407쪽)이라는 조건을 내건다.
저자가 소개하는 크롬워 나뭇재로 만든 요구르트 맛, 월넛 잎이 들어간 피클 맛, 복잡함과 상큼함이 어우러진 특별한 발사믹 식초 맛, 가문비나무의 껍질 틀로 만든 치즈 맛, 아직까지 먹어본 적이 없는 트러플 맛도 궁금하다. 맛을 부드럽게 다듬어주는 나무의 역할을 목수 일에 비유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가구의 모양이 얼추 완성되면 그때부터 지루하지만 꼭 필요한 사포질과 표면 마무리 작업이 시작된다. (중략) 이렇게 표면을 부드럽게 하는 과정을 거치면 남아 있는 도구 자국이 없어지고 날카로운 모서리가 부드러워지며 매끈하게 윤기가 난다. 그러면 가시에 찔릴 걱정 없이 나무를 만질 수 있다. 바로 이 과정이 발사믹 식초를 만들 때 나무통 안에서 벌어지는 것 같았다."(302-303쪽)
여러 나무의 잎, 껍질, 수액, 형성층, 추출액 등을 맛보았던 저자는 목질 자체를 먹어보려고 시도한다. 통밀 빵을 만들기 위한 통밀가루의 일부를 너도밤나무 톱밥 혹은 소나무 톱밥으로 대신했다. 여러 경로의 검색을 통해, 저자는 아르헨티나의 한 작은 회사에서 나무 제품을 만들어 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나무로 만든 설탕 절임 과자를 먹게 되는 과정도 그의 맛 묘사만큼 흥미로웠다. 이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지인들을 초청해서 자신이 실험하고 개발한 나무와 관련된 음식들을 나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음식도 우리 삶도 타인과의 교류로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리라. 이 책에서 결론을 대신할 한 문장을 만났다.
"나무는 인간이 망가뜨리고 있는 균형을 필사적으로 다시 잡아주는 균형추다."(404쪽)
나무와 음식, 그 둘을 하나로 엮어낸 책이라니 놀랍다. 나무 맛을 찾아 떠난 저자의 탐험, 자신의 부엌에서 직접 나무 맛을 재현해보는 요리사 혹은 과학자 마인드, 재료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 지식, 숲 생태학과 미식학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글쓰기의 향연을 보여준 책이다. 이 책을 보고 나니, 문득 예전에 맛본 대나무밥이 떠오른다. 메이플 시럽과 발사믹 식초를 활용한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여러 가지 차를 음미해보는 취미를 가져봐도 좋겠구나 싶다. 수목원이나 생태공원을 거닐어보는 여유를 뒤로 미루어야 한다면, 일상에서 찾아보는 나무 맛이 뜻밖의 편안함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 않을까.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