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보기 - 에리히 캐스트너 시집
에리히 캐스트너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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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정이 죽어 버린 정원을 거닐며/ 유머의 나무를 심는다."(150쪽)

에리히 캐스트너의 시집 <마주보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표현이었다. 전체 시에서 흐르는 정서는 담담함과 쓸쓸함에 가까워서 '유머'라는 단어가 처음에는 의외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 의미가 단순한 익살이 아니라 삶의 희망적 태도라고 한다면, 수긍할 수 있다. '헛된 웃음소리'에서 참된 웃음소리를 갈망하거나 '비관주의자란, 딱 잘라 말하면'에서 비관주의자를 "모든 게 엉망이라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212쪽)이라 칭하는 맥락과 같지 않을까.

시인은 읊조린다. 이 시대는 죽어 가고 있고 대포가 꽃피는 나라에는 자유가 자라지 않는다고. 이 시집의 출간 시기는 1936년. 히틀러 정권 하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시인의 독일 내 출판 활동 금지로, 이 시집은 스위스에서 출간된다. 시인은 1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후 심장병을 얻어 평생 고생하는데, 이 시집에서 심장 관련 시 여러 편도 감상할 수 있다.

'옮긴이의 글'을 참고로 시인의 삶과 작품 경향을 대략적으로 살필 수 있다.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이 시집을 필사하며 읽고 위로받았다는 일화, 발터 벤야민이 시인의 한 시집에 대해 "좌파 멜랑콜리"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한 비평 내용을 흥미롭게 읽었다.

시인의 삶과 시집 출간의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이 시집은 오늘날 독자에게도 시공을 초월한 의미, 일상의 위로를 안겨주는 듯하다. 현학적이거나 관념적인 단어가 많이 쓰이지 않았고 비교적 쉽게 읽히는 시라서 그렇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시집이 '가정상비약'처럼 필요한 순간에 읽히기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시집의 원제는 <에리히 캐스트너 박사가 시로 쓴 가정상비약>이다.)

이 책의 '차례' 다음에 제시된 '사용 지침서'를 보면서, 36가지 사례에 따른 적절한 시들을 복용할 수 있다. 코로나와 무더위, 그리고 이런저런 고민이 겹친 요즘, "삶에 지칠 때"를 찾아보기로 한다. 여섯 편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먼저 '슬퍼할 용기' 전문이다.

슬플 땐 슬퍼하라.

자꾸만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 말라!

슬픔은

당신의 소중한 생명을 갉아먹지 않는다.

(20쪽)

이후 시들은 묘지에 앉아 매일 죽음을 기다리는 노파, 자살할 생각 말고 살아남으라는 훈계,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는 법이고 그런 날도 지나간다는 것, 자동차에 치는 상상을 펼쳐 보인 내용, 자살자가 과꽃 다발을 들고 어머니의 무덤가에서 하는 상념 등을 담고 있다. 분명히 "삶에 지칠 때" 복용할 시들이 맞나 다시 확인해본다. 얼핏 이질감이 들었던 이유는, 그저 기분을 좋게 해주는 덕담, 그런 표현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슬퍼할 용기'의 내용을 곱씹어본다. 슬픔을 애써 억누르고 가벼운 웃음으로 대체하는 것은 어쩌면 제대로 된 위안이 아닐 수 있겠구나 싶다. 마음이 무거워지고 어두워지려고 할 때, 그 마음 속으로 깊이 들어가보는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삶이 지치고 괴로운 순간, 시인은 그런 삶의 끝, 삶이 주는 고통이 사라지는 종말을 연관시킨다. 묘지 앞에서 삶을 다시 생각해보기를 권하는 듯하다.

삶의 여정을 기차 여행에 비유한 시(기차 여행, 기차 타기), 자신의 얼굴 대신 남의 얼굴로 바꾸는 꿈을 소개한 시(얼굴 바꾸는 꿈), 계획이 불어날수록 행동이 더욱 꼬이니 계획을 버리라는 시(제야의 격언), 부유함이 오히려 가족의 웃음을 앗아갔다는 시(현대적인 동화), 환상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안에서 살면 안 된다는 지혜를 상기시키는 시(조부모의 방문) 등도 의미 있게 감상했다.

이 시집의 제목 <마주보기>는, 결국 자기 내면과의 마주함을 전제하는 게 아닐까. 버거움, 두려움, 불안, 근심, 상처 등 자기 마음이 고통을 호소할 때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말고, 이 시집으로 처방하고 각 시를 복용해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살면서 감정이 메마르지 않도록, 그리고 유머를 잃지 않도록!

[출판시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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