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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공찬이 -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필사본 소설
김주연 그림, 김재석 글, 채수 원작 / 고래가숨쉬는도서관 / 2021년 6월
평점 :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필사본 소설이라니! 이런 소설이 있었나 싶었다. '작가의 말'을 통해 그 배경을 먼저 살펴봤다. 조선 전기 채수(1449-1515)가 쓴 한문 소설 <설공찬전>은 <조선왕조실록>에 필화 사건으로 흔적만 기록되어 있고 <패관잡기>에 그 내용이 간단히 언급되어 있는데, 한문 원본은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한글 필사본이 1996년 발견되었지만 미완결되어 있다. 이 책 <설공찬이>는 남아 있는 본문 내용을 참고로 이야기의 공백을 메운 창작물이다.
전라도 순창 마암 마을의 설충란에게는 큰딸과 아들이 있었는데, 큰딸 초희는 시집 가서 자식 없이 일찍 죽었고 아들 공찬은 누이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곡기를 끊었다. 그러다가 스물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찬이 이승을 떠난 지 5년이 되는 해, 설충란의 동생인 설충수의 아들 공침이 갑자기 병이 든다. 눈동자가 뒤집혀 흰자위가 드러나고 입에서는 거품을 물고 꽥꽥대는 상황이었다. 설충수는 박수무당을 불러들였고, 그가 공침의 이마와 팔다리에 부적을 붙인다. 곧이어 공침이 여자 목소리로 울부짖는다. "나는 여자라서 이기지 못하고 나간다. 하지만 내 남동생 공찬이를 데려오겠다."(40쪽) 여자라서 이기지 못한다니, 맺힌 한이 있어 찾아왔다면 풀고 갔어야지! 아쉬운 대목이다.
이후 공침의 몸 속에 공찬의 혼령이 들어오고, 그 혼령이 몸을 들락거리는 일로 공침은 눈과 목젖이 붓고 밥도 잘 먹지 못하게 된다. 설충수가 박수무당을 부르려고 하자 공찬의 혼령은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며 공침의 눈자위를 찢고 혀를 뽑아낸다. 설충수는 박수무당을 부르지 않겠으니 공침을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이후 공찬은 공침의 사촌과 친구 앞에서 저승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공찬은 저승에서 증조부 설위를 만나고 먼저 죽은 누이 초희를 만난다. 이승에서는 마음껏 글을 배우지 못했던 초희는, 저승에서 글을 잘 짓고 학문이 출중하여 이승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명부 일을 맡았다. 공찬은 생전에 아버지에게 질문했었다. 공부를 하고 싶은 누이가 왜 배움의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느냐고. 아버지 설충란은 남녀구별,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답변하지만 공찬에게 만족스러운 답일 리 없다. 공침은 "어디 감히 아녀자가 글공부를 한다고!"(74쪽) 하면서 공찬을 놀리고 초희가 내온 책거리 송편을 공찬의 입에 억지로 쑤셔넣으려 했다. 이 대목에서, 공침이가 공찬의 혼령에게 혼쭐이 날 만도 했구나 싶다. 이후 언문으로 들소리를 만든 초희, 거기에 곡을 붙여 농사꾼 아이들에게 널리 퍼뜨린 공찬을 곤경에 빠뜨린 장본인도 공침이었다.
<설공찬이>는 두 축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공찬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원작자 채수가 그려낸 저승의 여러 면모를 들여다보는 일, 그리고 초희와 공찬 남매의 우애를 중심으로 한 설충란 가족의 이야기. 저승 이야기 끝부분마다 공찬은 교훈의 말을 덧붙이기도 한다. 적선을 많이 하면 저승에서 높은 신분으로 사니까 적선하라는 말, 이승에서 바른말을 하다가 제명에 못 산 사람도 천상계에서 좋은 벼슬을 했다는 말, 이승에서 쌓은 공덕이든 악덕이든 저승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말 등이다. 유교 중심, 중국 사대주의가 강했던 조선 양반 사회에서, 원작자 채수는 글재주가 뛰어나면서 아녀자라는 이유로 글문이 막혀버린 초희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배우기 쉬운 한글로 농사꾼들의 시름을 달래는 글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점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공찬은 공침의 몸을 빌어 설충란에게 아버지 먼저 죽은 불효를 용서해달라고 말한 후, 누이에 대한 부당한 대우로 아버지를 원망했었다고, 그런 원망들은 저승에 가서 보니 자기 마음이 지어낸 이야기였노라고 토로한다. (원망의 이유가 분명했는데, 그냥 개인의 불효가 크다는 맥락으로 덮어버린다. 아버지의 한계를 넘어 당시 조선시대의 한계인 탓도 있겠다.) 할 말을 다한 공찬의 혼령은 불교 윤회사상이 반영되어 여인의 태로 들어간다.
이 책의 말미에는, 한문 소설 <설공찬전>이 왜 필화 사건에 연루됐는지 그 배경에 대해 알려주고, <설공찬전> 원문과 현대역, 책 속의 배경이 된 순창 문화 테마 여행지를 싣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보다 100년 앞서 나왔다는 채수의 <설공찬전>의 의미는, 앞으로도 계속 연구될 여지가 있겠다. 무엇보다 이런 책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남원' 하면 <춘향전>이 생각나듯이, 이제 '순창' 하면 <설공찬전>이 떠오를 듯하다.
[출판사가 제공한 책으로, 개인의 주관대로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