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은 삶에 대한 커다란 소설
수지 모건스턴 지음, 알베르틴 그림, 이정주 옮김 / 이마주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었던 수지 모건스턴의 동화들이 꽤 인상적이어서, 작가 이름을 메모해두었다. 이후 분주한 일상과 새로운 책들에 밀려 작가의 이름이 흐릿해져갈 때조차, 기회가 되면 작가의 다른 책들도 찾아봐야지 하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에 이 책을 만났는데, 좀 특이한 부분은 이 책이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의 번역본이라는 점이다. 수지 모건스턴은 미국 태생의 작가로서 2005년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훈장을 받은 이력이 있다. 작가의 생활터전이 프랑스인가. 그래서 글을 불어로 쓴 것인가. 지금 70대 중반인 작가의 현재 근황도 궁금하다. 잠시 이 책을 둘러싼 외적 관심을 뒤로하고, 내용 속으로 들어가본다.

 

열네 살 딸이 화자인 소설이다. 이름은 보니 보네. 줄곧 누군가에게 말하듯이 편하게 건네는 어조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 후, 자신과 할머니와 함께 산다. 소소한 일상으로 시작하는 에피소드인데, 각 이야기마다 붙여진 제목은 이럴까 저럴까의 선택사항이다. 인생이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라는 진리를 일깨우는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창한 의미 부여가 아니라도 학교 가기 전에 머리를 감을까 말까 같은 경우,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보니의 성격과 엄마의 성향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에피소드 제목마다 어떤 선택사항을 보여주니까, 이후 펼쳐질 내용에 쫑긋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렇게 세부 내용 가운데 전체 흐름이 연결된다. 엄마는 마흔여섯 살, 아빠는 그보다 두 살이 많지만 스물여섯 살로 보인단다. 일 년에 두세 번, 보니는 이미 다른 가정을 꾸린 아빠와 만난다.

 

"나는 내가 이혼 가정의 아이란 사실을 비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나는 집이 있고, 침대가 있고, 외할머니가 있고, 엄마가 있고, 이따금 만나는 아빠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아침부터 밤까지 격렬하게 싸우는 두 어른과 사는 것보다는 나아."(46-47쪽)

 

십대는 특히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데, 보니는 부모의 이혼 자체보다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이 소유하는 물건에만 관심을 둔다. 우리나라 동화나 청소년 문학도 이런 캐릭터가 많이 나와주면 좋겠다. 사회적 통념이 만든 가치관으로 어떤 행복이나 불행을 설정하지 않았으면, 또한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집중하기보다 자기가 누리는 환경을 긍정적으로 바라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혼란스러움은 있을 테지. 보니는 완벽해 보이는 단짝친구 도렐리 가족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불완전한 가정"에 대해 한탄하기도 한다. 문제 없는 가정이 없듯이, 도렐리의 아빠는 바람을 피운다. 상대는 프랑스어 선생님이다.

 

보니는 글쓰기 대회에 나갈 학생 둘 중 한 명으로 뽑혔고, 나머지 한 명은 보니가 혼자 좋아하는 카를이다. 대회 후원자이자 주관자인 펠릭스 아들러 씨는 보니, 카를, 다른 두 명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글을 쓰도록 한다. 그곳에 도착한 보니가 자기 소개를 하는 중에 "연필을 잡던 순간부터 글쓰기는 제게 공기와 같아요. (중략) 제 외할머니는 1그램의 행운이 1킬로그램의 황금보다 낫다고 말씀하세요."(109쪽)라고 말했던 대목이 인상적이다.

 

둘째 날 열린 글쓰기 대회의 주제는 '당신에게 살 날이 딱 하루만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였다. 이 주제로 글을 써봐도 좋겠다. 아니면 잠깐 멈추어 생각이라도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싶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보니는 궁금해하는 엄마와 할머니에게 말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좋았고, 그 좋은 것보다 훨씬 더 좋았고,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았어요!"(120쪽)

 

카를과 대회 장소인 도빌까지 2인용 자전거로 동행한 여정, 그곳의 화려한 분위기, 고급스러운 식당, 엄마에게 현재 남자친구가 없다면 소개해주고 싶은 아들러 씨 등, 보니가 하고 싶은 말들은 많지만 아빠의 두 번째 이혼 소식, 도렐리의 아빠가 떠나버린 소식이 전해지면서 보니가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런 와중에 보니는 엄마에게 글쓰기 대회에서 썼던 초고를 읽어드린다. 정말 잘썼다. 엄마를 웃게 만들다가 엄마 눈을 크게 만들더니 엄마가 울게 만드는 글이다. 예감한 대로, 보니가 우승했다.

 

이 책에서는 보니의 일상뿐 아니라, 엄마도 외할머니도 말하기를 꺼렸던 외할아버지와 유품인 시계에 얽힌 사연이 나온다. 보니는 어른을 대하는 게 어렵다고 스스로 말하는데 실제 말하는 모습을 보면 그 반대 같다. 카를 집을 방문했을 때 카를의 엄마에게 왜 이혼하셨냐고 묻고, 이혼 가정이 되어 충격을 받은 도렐리와 도렐리의 엄마를 위로하며, 부유하나 외롭게 지내는 친할머니에게는 같이 살자고 제안한다.

 

무엇보다 글쓰기 대회에서 보니가 쓴 글이, 소설의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싶다. "인생은 누군가에게 애정을 느낄 때 아름다워."(117쪽), "그래, 인생은 아름다워. 힘든 순간이 있어도 말이야!"(140쪽),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워! 네가 쓴 것처럼 말이야. 불완전해도 말이야."(142쪽) 등의 문구와 연관되면서,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도 떠오르게 만든다.

 

보니가 글쓰기 대회에 참가한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문득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대표로 뽑혀서 백일장 대회에 나간 일도 떠올랐다. 교내 글쓰기 시간에는 연필이 꽤 잘 움직였는데, 뭔가 중압감이 느껴졌던가. 대회 장소에서 째깍째깍 시간이 흐르고 각 학교의 대표로 온 아이들이 슥삭슥삭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나의 연필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던 기억이 있다. 뭔가 쓰긴 써서 냈는데 스스로도 '첫 문장부터 망했다'고 예감했던 대회였다. 보니처럼 큰 상을 받았다면 이후의 내 삶은 달라졌을까. 그런 상상도 잠깐 해보다가, 다시 이 소설로 돌아온다.

 

작가는 보니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 글을 쓸 때 선택사항이 많다는 것, 그것은 우리 삶도 그러하다는 사실 말이다. "삶에서는 우유부단한데, 종이 위에서는 확신에 찰 수 있을까?"(142쪽)라는 질문 속에는 삶과 글이 다르지 않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듯이다. 삶과 글의 공통점이 많다고 해도, 제대로 쓰려면 결국 제대로 사는 게 먼저라는 진리도 상기해본다. 제목 <내 작은 삶에 대한 커다란 소설>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보는 시간도 잠시 남겨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